명심초감

역주 · 원오심요 · 上권 37편

민지고(民知庫)에게 주는 글

示民知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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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의 풀이 1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비유와 靈雲桃花悟道·趙州勘破臺山婆子 등의 공안은 『圜悟語錄』·『碧巖錄』 계열에서 반복 거론되어, 본문의 압축 인용을 실제 공안으로 동정하는 근거가 된다.
37.1
한문民禪錦官大慈傳法昭律師之法孫。纔披削,卽習家業,學四分毗尼。
번역민 선객(民禪)은 금관(錦官) 대자사(大慈寺)에서 법을 전한 소율사(昭律師)의 법손이다. 머리를 깎자마자 곧 집안의 업을 익혀, 사분율(四分毗尼)을 배웠다.
既而搯布巾,欲離法自淨,乃肩錫南游,訪西來宗旨。
그러다 베 두건(布巾)을 벗었다. 법을 떠나 스스로 맑아지려 한 것이다. 이에 석장을 메고 남쪽으로 다니며, 서쪽에서 온 종지(西來宗旨)를 찾았다.
抵夾山,因相從住道林。久之,老僧領蔣山,參扣愈堅確。
협산(夾山)에 이르러, 그 인연으로 함께 따라와 도림(道林)에 머물렀다. 오랜 뒤 노승이 장산(蔣山)을 맡게 되자, 찾아와 두드림이 더욱 굳고 확실해졌다.
其於領略,能自擺撥知解,要全機直透。每應緣酬唱,一往直截,頗有蘊藉,爲可喜也。
그는 알아차리는 데에서, 스스로 알음알이(知解)를 떨쳐 버리고 온 기틀로 곧장 뚫으려 했다. 인연 따라 주고받을 때마다 한결같이 곧바로 끊어 낸다. 자못 함축된 여운이 있어 기뻐할 만하다.
쉽게 읽기민 선객은 금관, 곧 성도의 대자사에서 법을 전한 소율사의 법손이다. 머리를 깎자마자 집안의 가업을 이어, 계율의 기본인 사분율을 배웠다. 그러다 율사의 베 두건인 포건을 벗고 계율의 길을 떠나, 스스로를 맑히려 하였다. 마침내 석장을 메고 남쪽으로 떠돌며, 달마가 서쪽에서 전한 뜻, 곧 서래종지를 찾아 나섰다. 협산에 이르러 그 인연으로 나를 따랐고, 도림에 오래 머물렀다. 내가 장산을 맡게 되자, 더욱 굳세게 참문하며 파고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알아차릴 때면 스스로 지해, 곧 따져서 아는 알음알이를 떨쳐 버리고, 온 기틀로 곧장 뚫으려 하였다. 인연을 만나 주고받을 때마다 한결같이 곧바로 끊어 내니, 자못 함축된 여운이 있어 기뻐할 만하다.
풀이 7
夾山善會 협산선회'抵夾山'의 夾山은 圜悟가 住持한 澧州 夾山 靈泉禪院이다(『碧巖錄』 권1 '師住澧州夾山靈泉禪院評唱'). 圜悟는 뒤에 道林·蔣山으로 옮겼다. 끝의 '夾山老子'는 開山 善會를 가리키는 듯하다(추정).
錦官 금관'民禪錦官大慈傳法昭律師之法孫'—成都 大慈寺에서 律을 전한 昭律師의 法孫이라는 말.
道林 도림'抵夾山,因相從住道林。久之,老僧領蔣山'—夾山에서 圜悟를 만나 道林까지 따랐고, 뒤에 圜悟가 蔣山을 맡자 계속 參扣했다. 夾山→道林→蔣山의 순서가 원오 전기와 맞는다.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頗有蘊藉
책의 오독이다. 蘊藉는 '함축·여운·포용력 있음'의 숙어인데, 책은 '상당히 공부가 쌓였으니'로 蘊을 단순 축적으로만 읽어 숙어를 놓쳤다. 자체역 '함축된 여운이 있어'가 옳다.
37.2
한문然以此根器,更効勤息志,到極深處無深,極妙處無妙,大休歇,大安穩,不動纖塵,只守閑閑地,聖凡莫能測,萬德不將來,然後可以分付鉢袋子也。
번역그러나 이만한 근기(根器)라면, 다시 부지런히 힘써 뜻을 쉬어야 한다. 지극히 깊은 곳에 이르면 깊음이 없고, 지극히 묘한 곳에는 묘함이 없다. 크게 쉬고 크게 편안하여, 가는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한가하고 한가한 자리를 지킨다. 성인도 범부도 헤아릴 수 없고, 온갖 덕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런 뒤에야 발우 주머니(鉢袋子)를 맡길 수 있다.
巖頭云:卻物爲上,逐物爲下。
암두(巖頭)가 말했다. “사물을 물리치는 것(卻物)이 위요, 사물을 좇는 것(逐物)이 아래다.”
萬境萬緣,以至古今言教,臨機應變。若自己根腳虗靜,圓明寂照,凡來干我,能以金剛王寶劒當鋒斬斷,則凜然神威,坐斷一切,不待卻而自退,豈不綽綽然有餘裕哉?
온갖 경계와 온갖 인연, 나아가 예와 지금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기틀을 만나 변화에 응한다. 만약 자기의 발밑 뿌리가 텅 비고 고요하며, 두루 밝아 고요히 비춘다고 하자. 무엇이든 내게 와서 건드리면,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으로 칼끝을 맞받아 베어 끊는다. 그러면 늠름한 신령한 위엄으로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끊어 버린다. 물리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간다. 어찌 넉넉하여 여유롭지 않겠는가.
儻立本不明,稍涉遲疑,則被牽引,酌然分疎不下,豈免隨他所轉?既隨他去,卒無自由分。
만일 근본을 세운 것이 밝지 못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곧 끌려간다. 분명하게 떨쳐 내지 못하니, 어찌 그것에 굴려 다님을 면하겠는가. 이미 그것을 따라가 버리면, 끝내 자유로울 몫이 없다.
至道簡易,唯卻與逐。善體道者,宜深思之。
지극한 도는 간단하고 쉽다. 오직 물리침과 좇음뿐이다. 도를 잘 체득하는 이는 마땅히 이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쉽게 읽기그러나 이만한 근기를 지녔더라도, 다시 부지런히 뜻을 쉬는 공부에 힘써 지극히 깊은 곳까지 이르러야 한다. 지극히 깊은 곳에는 도리어 깊음이 없고, 지극히 묘한 곳에는 묘함이 없다. 크게 쉬고 크게 편안하여,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한가로운 자리를 지킨다. 성인도 범부도 헤아릴 수 없고, 온갖 덕조차 끌어오지 않게 된 뒤에야, 발우 주머니, 곧 조사의 법을 물려줄 수 있다. 암두는 “사물을 물리치는 것이 위요, 사물을 좇는 것이 아래다”라고 하였다. 만 가지 경계와 인연, 나아가 예와 지금의 가르침을 마주하여 변화에 응할 때는 어떠한가. 자기의 발밑 뿌리가 텅 비고 고요하며 두루 밝게 비추어, 나에게 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강왕보검으로 칼끝을 마주해 베어 끊는다고 하자. 그러면 늠름한 위엄으로 모든 것을 앉은 자리에서 끊어 버려, 굳이 물리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가니,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 만일 근본이 밝지 못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곧 끌려가 시원하게 떨쳐 내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휘둘리는 것을 면하겠는가. 한번 끌려가 버리면, 끝내 자유로운 몫이 없다. 지극한 도는 간단하고 쉽다. 오직 물리침과 좇음이 있을 뿐이다. 도를 잘 체득하려는 이는, 마땅히 이를 깊이 새겨야 한다.
풀이 1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원문'極深處無深, 極妙處無妙'(부록본 '到極深處。無深極妙處無妙') → ‘국역본의 번역을 바로잡음’ 책이 지나치게 의역하고 축약하였다. '지극히 깊은 곳엔 깊음이 없고 지극히 묘한 곳엔 묘함이 없다'는 대구의 역설이 핵심인데, 책은 '더없이 깊고 오묘한 곳에'로 뭉뚱그려 無深·無妙의 부정 역설을 탈락시켰다. 대구를 살린 자체역이 우세하며, 표현은 다듬어 개정하였다.
37.3
한문古人爲此一段事,直得捨全身,立雪負舂,賣心肝,然兩臂,投猛火,聚七處,割截飼虎救鴿,捨頭施目,百種千端,蓋不艱苦則不深到。
번역옛사람은 이 한 가지 일을 위해 온몸을 버렸다. 눈 속에 서고(立雪), 방아를 짊어지고(負舂), 심장과 간을 팔고, 두 팔을 태우고, 맹렬한 불더미에 몸을 던지고, 일곱 군데를 베이고, 호랑이를 먹이고 비둘기를 구하고, 머리를 버리고 눈을 보시했다. 백 가지 천 가지였다. 대개 괴롭고 힘들지 않으면 깊이 이르지 못한다.
有志之士,固宜以古爲儔,晞顏慕藺也。
뜻있는 선비라면 마땅히 옛사람을 벗 삼아, 안연(顏淵)을 우러르고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해야 한다.
圓湛虗凝,道體也。展縮殺活,妙用也。
원만히 맑고 텅 비어 엉긴 것은 도의 본체(道體)다. 펴고 오므리며 죽이고 살리는 것은 묘한 작용(妙用)이다.
善游刃,能操守,如珠走盤,如盤走珠,無頃刻落虗。亦不分世法佛法,直下打成一片,所謂觸處逢渠,出沒縱橫,初無外物。
칼날을 잘 놀리고 잘 붙들어 지킨다. 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듯, 쟁반이 구슬 위를 구르듯 하여, 잠시도 헛되이 떨어지지 않는다. 또 세간법과 불법을 나누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 덩어리를 이룬다. 이른바 ‘닿는 곳마다 그를 만난다(觸處逢渠)’는 것이다. 나고 듦이 종횡무진하여, 애초에 바깥 사물이 없다.
淨倮倮,阿轆轆,以本分事印定,頭頭上明,物物上了,何處更有得失是非、好惡長短來?
깨끗이 벌거벗고(淨倮倮) 거침없이 굴러(阿轆轆), 본분사(本分事)로 도장 찍어 확정한다. 그러면 낱낱마다 밝고 물건마다 다 마친다. 어디에 다시 얻음과 잃음, 옳음과 그름, 좋음과 싫음, 긺과 짧음이 오겠는가.
但恐自己正眼未得洞明,是致落在二邊,則沒交涉也。
다만 자기의 바른 눈(正眼)이 아직 훤히 밝지 못해, 그 때문에 두 끝(二邊)에 떨어지면 아무 상관이 없게 될까 걱정될 뿐이다.
쉽게 읽기옛사람은 이 한 가지 일을 위하여 온몸을 다 버렸다. 눈 속에 서고, 방아를 지고, 심장과 간을 팔고, 두 팔을 태우고, 타오르는 불더미에 몸을 던지고, 일곱 곳을 베이고, 주린 호랑이를 먹이고 비둘기를 구하며, 머리를 버리고 눈을 보시하는 등, 그 길이 백 가지 천 가지였다. 대개 뼈아픈 고생을 겪지 않고서는,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다. 뜻있는 선비라면 마땅히 옛사람을 벗으로 삼아, 안연을 우러르고 인상여를 사모해야 한다. 원만히 맑고 텅 비어 엉겨 있음은 도의 본체요, 펴고 오므리며 죽이고 살림은 그 묘한 작용이다. 칼날을 잘 놀리고 능히 지켜 냄이, 마치 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고 쟁반이 구슬을 좇는 것과 같다. 잠깐도 헛되이 떨어지지 않으며, 세간의 법과 부처의 법을 나누지 않고 곧바로 한 조각으로 두들겨 이룬다. 이른바 닿는 곳마다 그를 만나 나고 듦이 자유로워, 애초에 바깥 사물이랄 것이 없다. 깨끗이 벌거벗고 걸림 없이 구르듯, 본분사로 도장 찍듯 못 박으니, 낱낱이 밝고 물건마다 마친다. 그러니 어디에 다시 얻고 잃음, 옳고 그름, 좋고 싫음, 길고 짧음이 오겠는가. 다만 자기의 바른 눈이 아직 훤히 밝지 못해, 그로 인해 양변에 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을까 두려울 뿐이다.
풀이 7
負舂 부용立雪은 慧可가 눈 속에 서서 達磨에게 법을 구한 일(『景德傳燈錄』 권3 '汝久立雪中。當求何事').
七處割截 칠처할절'立雪·負舂·賣心肝·然兩臂·投猛火聚·七處割截·飼虎·救鴿·捨頭施目'의 捨身 고행 나열 속 한 항목. 번역은 '投猛火聚,七處割截'로 끊어 읽었다.
淨倮倮 정라라'淨倮倮,阿轆轆' — 阿轆轆(地)는 수레바퀴가 거침없이 구르는 모양으로 걸림 없는 작용을 그린다. 淨倮倮(본체)와 짝을 이룬다.
교감 · 然兩臂'然兩臂'의 '然'은 '燃'(태우다)과 같은 글자로 쓰였다.
37.4
한문豈不見永嘉道:上士一決一切了,中下多聞多不信。
번역보지 못했는가. 영가(永嘉)가 말했다. “높은 선비는 한 번 결단하여 모두 마치고, 중간과 낮은 이는 많이 들을수록 많이 믿지 않는다.”
佛祖言教筌罤耳,藉之以爲入理之門。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은 통발과 올가미(筌罤)일 뿐이다. 그것을 빌려 이치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既廓然明悟承當得,則正體上一切圓具,觀佛祖言教皆影響邊事,終不向頂𩕳上戴卻。
이미 툭 트이게 밝게 깨달아 떠맡았다면, 바른 본체 위에 모든 것이 원만히 갖추어진다. 그러면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보아도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언저리 일이다. 끝내 정수리 위에 받들어 이지 않는다.
近世參學多不本宗猷,唯持擇言句、論親疎、辨得失,浮漚上作實解,是誇善淘汰得多少公案,解問諸方五家宗派語,一向沒溺情識、迷卻正體,良可憐慜。
요즘 참학(參學)하는 이들은 대개 종지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오직 말과 구절을 붙들어 가리고, 친하고 먼 것을 논하고, 얻고 잃음을 따진다. 물거품 위에서 실다운 알음알이를 짓는다. 그러고는 공안(公案)을 얼마나 많이 잘 걸러 냈는지, 제방(諸方)의 다섯 종파(五家) 말을 물을 줄 안다고 자랑한다. 한결같이 정식(情識)에 빠져 바른 본체를 잃으니, 참으로 가엾다.
有真正宗師不惜眉毛,勸令離卻如上惡知惡見,卻返謂之心行移換、擺撼煅煉,展轉入荊棘林中,所謂打底不遇作家,到老只成骨董。
참되고 바른 종사(宗師)가 눈썹을 아끼지 않고, 위와 같은 나쁜 앎과 나쁜 견해를 떠나라고 권한다. 그러면 도리어 그것을 두고, 마음 씀을 옮겨 바꾸게 하고 흔들어 단련시켜, 굴러굴러 가시덤불 숲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처음에 작가(作家)를 만나지 못하면, 늙도록 골동품만 될 뿐이다’라는 것이다.
省要處不消一劄,皮下有血;知落處苟或躊蹰,則失卻鼻頭也。
요긴한 곳은 한 번 찌를 것도 없다. 가죽 밑에 피가 있으면 떨어질 곳을 안다. 만일 머뭇거리면 곧 콧구멍(鼻頭)을 잃어버린다.
쉽게 읽기어찌 보지 못하였는가. 영가는 “높은 근기의 선비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마치고,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오히려 믿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은 통발과 올가미일 뿐이니, 그것을 빌려 이치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이미 확연히 깨달아 받아들였다면, 바른 본체 위에 모든 것이 두루 갖추어진다. 그러면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보아도, 다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언저리의 일일 뿐이다. 끝내 그것을 정수리 위에 떠받들지 않는다. 요즈음 배우는 이들은 대개 종지의 근본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오직 말과 글귀만 붙들어 가리며, 친함과 소원함을 논하고 얻음과 잃음을 따진다. 물거품 위에 실다운 알음알이를 지어, 공안을 얼마나 많이 골라냈는지, 선문 다섯 갈래 종파의 말을 풀이할 줄 아는지를 자랑한다. 한결같이 알음알이에 빠져 바른 본체를 잃으니, 참으로 가엾다. 참되고 바른 종사가 있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이런 나쁜 지견을 떠나라 권한다. 그런데도 도리어, 자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단련시켜 가시덤불 숲으로 몰아넣는다고 여긴다. 이른바 처음에 작가, 곧 눈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늙도록 그저 골동품이나 이룰 뿐이다. 요긴한 곳은 한 번의 찌름도 필요치 않다. 가죽 밑에 피가 도는 산 사람이라면 곧 떨어질 곳을 알 것이나, 머뭇거리면 곧 콧구멍, 곧 제 근본 생명을 잃어버린다.
풀이 1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원문 '省要處不消一劄'에서 '不消'는 선가·백화의 표준 어휘로 '~할 필요가 없다(用不着)'의 뜻이다. 뒤 구절 '皮下有血'(가죽 밑에 피가 있다)이 즉각적 생기·활력을 기리는 문맥과 이어지므로, '요긴한 곳은 한 번 찌를 것도 필요치 않다'는 즉효로 읽은 자체역이 옳다. '不消'를 '쓰지 못한다'로 본 책 독해는 표준 어휘·구문에 어긋난다. → ‘국역본의 번역을 바로잡음’
37.5
한문七佛已前便與麼,直須硬糾糾緊著頭皮,分明歷落,薦取這一片田地,
번역일곱 부처(七佛) 이전에도 바로 이러했다. 모름지기 굳세게 머리 가죽을 바짝 조이고, 분명하고 또렷하게 이 한 조각 땅(田地)을 알아차려야 한다.
穩密長時,乃自會退步,終不道我有見處、我有妙解。
오래도록 차분하고 빈틈없이 지내면, 이에 저절로 물러설 줄 안다. 끝내 ‘나는 본 곳(見處)이 있다, 나는 묘한 앎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何故?箇中若立一絲毫能所見刺,則重過山嶽,從上來決不相許。
왜 그런가. 그 속에 실오라기 하나만큼이라도 주관과 객관(能所)이라는 견해의 가시를 세우면, 그 허물이 산보다 무겁다. 예로부터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是故釋迦文於然燈佛,以無法得授記;盧老於黃梅,以本來無物親付衣鉢。
그러므로 석가문(釋迦文)은 연등불(然燈佛)에게서 얻은 법이 없음으로 수기(授記)를 받았다. 노로(盧老)는 황매(黃梅)에게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物)’로 친히 가사와 발우를 받았다.
至於生死之際,纔自擔荷,則如靈龜曳尾,應須淨穢二邊都不依怙,有心無心、有見無見,似紅鑪著一點雪,
나고 죽는 갈림길에 이르러 스스로 짊어지려 들기만 하면,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靈龜曳尾)과 같다. 깨끗함과 더러움 두 끝에 도무지 기대지 말아야 한다. 마음 있음과 마음 없음, 봄 있음과 봄 없음을, 벌겋게 단 화로에 눈 한 송이 떨어지듯 해야 한다.
二六時中透頂透底、灑灑落落,遊此千聖不同途處,直下令純熟,自然成就得箇絕學無爲、千人萬人羅籠不住底真實人也。
하루 내내 정수리까지 뚫고 밑바닥까지 뚫어, 시원하고 말쑥하게, 일천 성인도 같은 길을 가지 않는 이 자리에서 노닐어라. 그 자리에서 무르익게 하면, 저절로 배움이 끊어져 할 일 없는(絕學無爲), 천 사람 만 사람이 그물로도 가두지 못하는 진실한 사람을 이룬다.
쉽게 읽기일곱 부처 이전에도 이러하였다. 모름지기 굳세게 머리 가죽을 단단히 붙들어, 이 한 조각 밭, 곧 본래의 자리를 분명하고 또렷하게 알아차려 얻어야 한다. 차분하고 빈틈없이 오랜 시간 지내면 저절로 물러설 줄 알게 되어, 끝내 “나에게 깨친 자리가 있다, 나에게 묘한 앎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가운데 실낱만큼이라도 ‘나’와 ‘대상’이라는 견해의 가시를 세운다면, 산악보다 무거운 허물이 된다. 예로부터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연등불에게서 아무 법도 얻음이 없이 수기를 받았고, 육조 혜능은 오조에게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그 자리로 친히 옷과 발우를 전해 받았다. 나고 죽는 갈림에 이르러 겨우 스스로 짊어지려 하면, 마치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끌어 도리어 흔적을 남기는 것과 같다. 그러니 깨끗함과 더러움 두 갈래에 도무지 기대지 말라. 마음이 있음과 없음, 견해가 있음과 없음을, 벌겋게 단 화로에 눈송이 한 점 떨어지듯 녹여야 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정수리를 뚫고 밑바닥을 뚫어, 훤칠하고 시원하게 저 일천 성인도 함께 가지 못하는 자리에서 노닌다. 그렇게 곧바로 무르익으면, 자연히 배움을 끊고 함이 없는 경지를 이룬다. 마침내 천 사람 만 사람이 그물로도 가두지 못하는 진실한 사람이 된다.
37.6
한문趙州和尚見僧,喚云:近前來。僧近前,州云:去!多少省力。
번역조주(趙州) 화상이 어떤 승려를 보고 불렀다. “가까이 오너라.” 승려가 다가오자 조주가 말했다. “가거라.” 얼마나 힘을 덜었는가.
若薦得,乃是十成;若作,如之若何?則知見生也。
이를 알아차리면 곧 온전히 이룬 것(十成)이다. ‘이를 어찌할까’ 하고 짓는다면, 곧 알음알이가 생긴 것이다.
古人有具大慈悲,見人當面,不自承當,方便撥正,通箇入路。
옛사람 가운데는 큰 자비를 갖춘 이가 있었다. 사람이 눈앞에 두고도 스스로 떠맡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방편으로 바로잡아 들어갈 길 하나를 틔워 주었다.
如古堤見僧來,便云:退後!退後!汝無佛性。後來只有箇仰山,能知渠端的。
이를테면 고제(古堤)는 승려가 오는 것을 보면 곧 말했다. “물러서라, 물러서라. 너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뒷날 오직 앙산(仰山) 하나만이 그 참뜻을 알았다.
如今拈問學者,十箇有五雙茫然,爲向伊句下死了,所以無瞥地分。
지금 이것을 들어 배우는 이들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멍하다. 그 구절 아래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뜻 깨칠 몫이 없다.
若據活處,如何吐露?切忌隨他語句好。
살아 있는 자리(活處)에 의거한다면, 어떻게 드러내 말하겠는가. 부디 그 말과 구절을 따라가지 말라.
靈雲作頌悟桃花,玄沙言渠未徹,老婆臺山指路,趙州歸來說勘破,
영운(靈雲)은 복사꽃에 깨치고 게송을 지었는데, 현사(玄沙)는 그가 아직 사무치지 못했다고 했다. 노파는 대산(臺山) 가는 길을 가리켰고, 조주는 돌아와 간파했다(勘破)고 말했다.
叢林中作種種論量,只贏得閙。殊不知古人如敲門瓦子相似,只貴得入門,
총림(叢林)에서는 이를 두고 갖가지로 따지지만, 시끄러움만 실컷 얻을 뿐이다. 옛사람의 것이 문 두드리는 기왓조각(敲門瓦子)과 같아서, 다만 문에 들어가는 것을 귀히 여길 뿐임을 전혀 모른다.
既入得門了,安可執卻瓦子作奇特事?
이미 문에 들어갔다면, 어찌 기왓조각을 붙들고 기특한 일로 삼겠는가.
謂諦當直截顯露,落在甚處?還委悉麼?毫氂有差,天地懸隔。
딱 들어맞고 곧장 끊어 훤히 드러났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떨어지는가. 자세히 알겠는가. 털끝만큼 어긋나도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쉽게 읽기조주 화상이 어떤 승려를 보고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하니, 승려가 다가왔다. 그러자 조주가 “가거라, 얼마나 힘을 던 것이냐” 하였다. 이를 알아차리면 곧 완전히 이룬 것이지만, “이렇다면 어떤가” 하고 헤아리면 곧 알음알이가 생겨난 것이다. 옛사람은 큰 자비를 갖추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스스로 받아들여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방편으로 바로잡아 하나의 들어갈 길을 열어 주었다. 마치 고제 화상이 오는 승려를 보고 곧 “물러서라, 물러서라,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뒷날 오직 앙산만이 그 참뜻을 알았다. 지금 이를 들어 배우는 이들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아득히 막혀 그 구절 아래에서 죽어 버리니, 언뜻 깨치는 몫이 없다. 살아 있는 곳에 의거한다면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부디 그 말과 구절을 따라가지 말라. 영운은 복사꽃을 보고 깨달아 게송을 지었으나, 현사는 그가 아직 사무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노파는 대산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고, 조주는 돌아와 그 노파를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총림에서는 이를 두고 갖가지로 따지지만, 그저 시끄러움만 실컷 얻을 뿐이다. 옛사람의 이런 말이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과 같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문에 들어감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이미 문에 들어갔는데, 어찌 기왓조각을 붙들고 기특한 일로 삼겠는가. 이른바 딱 들어맞고 곧장 끊어 훤히 드러났다는 것이, 대체 어디에 떨어지는가. 도리어 자세히 아는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처럼 아득히 벌어진다.
풀이 6
仰山慧寂 앙산혜적『景德傳燈錄』 권9 朗州古堤和尚: 오는 승려마다 '去 汝無佛性'이라 하였는데 仰山이 '叉手近前應諾'하자 古堤가 웃으며 '子什麼處得此三昧'라 하였다(T51n2076_p0270a17~a19).
敲門瓦子 고문와자靈雲桃花·玄沙未徹·臺山婆子·趙州勘破 등 古則을 들고, 이를 두고 叢林이 論量하는 것을 꾸짖으며 '古人如敲門瓦子相似,只貴得入門'이라 한다.
趙州勘婆 조주감파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 영운도화(靈雲桃花)·현사미철(玄沙未徹)·조주감파(趙州勘婆) :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비유와 영운도화오도(靈雲桃花悟道)·조주감파대산파자(趙州勘破臺山婆子) 등의 공안은 「원오어록(圜悟語錄)」·「벽암록(碧巖錄)」 계열에서 반복 거론되어, 본문의 압축 인용을 실제 공안으로 동정하는 근거가 된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원문 '州云:去。多少省力'의 구두·귀속은 양립 가능한 이독이다. 자체역은 '多少省力'을 조주의 방편을 기리는 원오의 감탄('“가거라.” 얼마나 힘을 덜었는가')으로 앞 구절에 붙였고, 책은 뒤 구절에 이어 '얼마간 힘을 덜어 알아차린다면 십분 성취'로 읽었다. '近前來→去'의 노고 절감을 평하는 원오의 어투로는 자체역 귀속이 자연스러우나, 두 구두가 모두 문맥상 성립하고 이를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으므로 ‘두 읽기가 다 성립함’로 유지한다.
37.7
한문入荒田,不揀信手拈來草,其柰亦能殺人,亦能活人。
번역거친 밭에 들어가 가리지 않고, 손 가는 대로 풀을 집어 온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 풀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苟或著得眼正,下得手親,則一莖草可使作丈六金身,況其他變化乎。
만일 눈을 바로 붙이고 손을 친히 댈 줄 알면, 풀 한 줄기로 열여섯 자 금빛 몸(丈六金身)을 짓게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밖의 변화이겠는가.
根本既明,於日用中鋤田墾土,春種秋收,無非與夾山老子親唱酬,
근본이 밝아졌으면, 날마다 밭을 매고 흙을 일구며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는 일이, 모두 협산 노인과 친히 주고받는 일이다.
地藏阿師展演,同一梵行,踐履純熟,高據毗盧,傳此正法,豈不妙哉。
지장(地藏) 스님이 펼쳐 보인 것과도 똑같은 하나의 깨끗한 행(梵行)이다. 밟아 가는 것이 무르익어 비로자나(毗盧) 위에 높이 앉아 이 바른 법을 전한다면, 어찌 묘하지 않겠는가.
쉽게 읽기거친 밭에 들어가 가리지 않고 손 가는 대로 풀을 집어 오지만, 그 풀이 또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니 어찌하겠는가. 눈을 바르게 붙이고 손을 친절히 대면, 한 줄기 풀로도 열여섯 자 금빛 부처의 몸을 짓게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밖의 온갖 변화이겠는가. 근본이 이미 밝으면, 날마다 밭을 매고 흙을 일구며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는 일이 모두, 협산 노인과 친히 주고받는 일 아님이 없다. 지장 스님이 펼쳐 보인 것도 다 똑같은 청정한 수행이다. 밟아 행함이 무르익어, 높이 비로자나의 자리에 웅거하여 이 바른 법을 전한다면, 어찌 묘하지 않겠는가.
풀이 4
示民知庫 시민지고'於日用中鋤田墾土,春種秋收,無非與夾山老子親唱酬'는 夾山 시절의 인연을 들어 일상의 소임이 곧 梵行임을 말한 것으로, 知庫 소임에 맞춘 말로 보인다(추정).
毗盧 비로'踐履純熟,高據毗盧,傳此正法'은 일상의 밭일이 그대로 梵行으로 무르익으면 法身의 자리를 차지하여 정법을 전한다는 말이다.

上권 차례 (68편)

이 편의 낱말 69
  1. 四分毗尼 사분비니

    사분률(四分律)(담무덕부 율장)이다. 비니(毗尼)=vinaya(율). 민(民)이 처음 배운 계율학이다

  2. 肩錫 견석

    석장(錫杖)(주장자)을 어깨에 멤이다. 행각(遊行)의 관용 표현이다

  3. 金剛王寶劍 금강왕보검

    금강처럼 단단한 왕의 보검이라는 말이다. 모든 알음알이와 망상을 한칼에 끊는 지혜의 작용을 비유한다. 임제(臨濟) 스님이 할(喝)의 네 가지 쓰임을 말하며 첫째로 들었다.

  4. 立雪 입설

    '눈 속에 서다'라는 말로, 혜가가 달마에게 법을 구하던 일을 가리킨다. 큰 눈이 내리는 밤에도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날을 새우니 새벽에는 쌓인 눈이 무릎을 넘었다고 한다. 이어 제 팔을 끊어 뜻을 보였으므로 입설단비(立雪斷臂)라 하여 목숨을 건 구도의 본보기로 든다.

  5. 負舂 부용

    방아를 진다는 말로, 육조 혜능이 황매(黃梅)의 오조 홍인 문하에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으며 지낸 일을 이른다. 허리에 돌을 매달고 방아를 찧었다고 전하며, 몸을 잊고 법을 구한 본보기로 든다.

  6. 賣心肝 매심간

    상제보살(常啼菩薩)(살타파륜(薩陀波崙))이 반야(般若)를 구해 담무갈(曇無竭)에게 공양하고자 심장·간·골수를 판 고사다(반야경(般若經) 상제품(常啼品))

  7. 然兩臂 연량비

    연량비(燃兩臂). 약왕보살(藥王菩薩)이 팔을 태워 공양한 사신공양이다(법화경(法華經)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8. 投猛火聚 투맹화취

    구법·공양을 위해 불더미에 몸을 던진 사신구법 계열 본생담이다(특정 편은 추정)

  9. 七處割截 칠처할절

    몸을 일곱 군데나 베인다는 말로,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고통을 견디는 일을 비유한다. 흔히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몸을 베이고도 성내지 않은 이야기와 이어 읽는다.

  10. 飼虎 사호

    살타태자(薩埵太子)(마하살타(摩訶薩埵))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먹인 사신사호다(금광명경(金光明經) 사신품(捨身品))

  11. 救鴿 구합

    시비왕(尸毗王)이 매에게 쫓긴 비둘기를 구하려 제 살을 저며 준 할육무합이다

  12. 捨頭施目 사두시목

    머리와 눈을 보시한 본생담이다(월광왕(月光王)의 시두(施頭), 시비왕(尸毗王)/쾌목왕(快目王)의 시목(施目) 등)

  13. 善游刃 선유인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유인유여(游刃有餘)'다. 걸림 없는 묘용이다

  14. 如珠走盤 여주주반

    구슬이 쟁반을 구름이다. 자재무애한 작용의 선가 상투 비유다

  15. 淨倮倮 정라라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깨끗이 발가벗었다는 말이다. 아무것에도 가려지거나 기대지 않은 본래 마음의 맨모습을 그린다. 흔히 정라라적쇄쇄(淨倮倮赤灑灑)로 이어 쓴다.

  16. 永嘉玄覺 영가현각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이다. 당나라 선승으로 천태 지관을 닦다가 조계로 육조혜능을 찾아갔다. 문답 끝에 인가를 받고 하룻밤 묵고 떠나 일숙각(一宿覺)이라 불렸다. 그가 지었다는 「증도가(證道歌)」 구절이 선문에서 널리 인용된다.

  17. 上士一決一切了·中下多聞多不信 상사일결일체료 중하다문다불신

    '높은 근기의 사람은 한 번 결단하여 모든 것을 마치고, 중·하 근기는 많이 들어도 대개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영가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 구절이다.

  18. 五家宗派 오가종파

    임제·조동·운문·위앙·법안 오가(五家)다. '오가 종파어를 안다고 자랑함'을 비판한다

  19. 作家 작가

    선가에서 솜씨와 안목을 두루 갖춘 노련한 스승을 이른다. 배우는 이의 됨됨이를 꿰뚫어 보고 자유자재로 이끄는 사람이다. 오늘날 글 쓰는 사람을 뜻하는 '작가'와는 뜻이 다르다.

  20. 皮下有血 피하유혈

    살아 있는 사람, 곧 참된 근기를 갖춘 자를 이르는 선가 관용어다

  21. 鼻孔 비공

    콧구멍이다. 선문에서는 사람마다 본래 갖춘 근본 생명, 곧 본래면목을 빗대는 말로 쓴다. '콧구멍을 잃는다'는 그 근본을 놓친다는 뜻이고, '남의 콧구멍을 쥐고 끈다'는 상대를 마음대로 휘어잡는다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비두라고도 쓴다.

  22. 七佛以前 칠불이전

    과거 칠불(七佛)(비바시~석가) 이전, 곧 위음왕(威音王) 이전·공겁 이전의 본지풍광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23. 薦取 천취

    곧바로 알아차려 얻음이다. 사량분별 없이 즉하에 계합함을 뜻하는 선어다

  24. 釋迦文於然燈佛以無法得授記 석가문어연등불이무법득수기

    석가(釋迦)(석가문불(釋迦文佛))가 연등불(然燈佛)(Dīpaṃkara)에게 '얻은 법이 없이' 수기 받음이다. 금강경(金剛經) '여래어연등불소(如來於然燈佛所), 어법실무소득(於法實無所得)'이다

  25. 盧老於黃梅以本來無物親付衣鉢 노로어황매이본래무물친부의발

    혜능(慧能)(속성 노(盧), 노행자(盧行者))이 황매(黃梅) 오조(五祖)에게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게송으로 의발을 전수받음이다(壇經)

  26. 靈龜曳尾 영귀예미

    영묘한 거북이 꼬리로 자취를 지우려다 오히려 자국을 남김이다. 조작이 흔적을 남김의 비유다(장자(莊子) 예미도중(曳尾塗中) 전거)

  27. 紅鑪著一點雪 홍로저일점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벌겋게 단 화로의 한 점 눈처럼 즉시 녹아 사라짐이다. 원오가 즐겨 쓴 비유다

  28. 羅籠不住 나롱부주

    그물로도 새장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말이나 틀, 경계에도 붙들리지 않고 자유로운 깨달은 이의 모습을 그린다. ‘천 사람 만 사람이 가두지 못한다’는 꼴로 자주 쓴다.

  29. 趙州近前來去多少省力 조주근전래거다소성력

    조주종심(趙州從諗)이 승을 불러 다가오게 한 뒤 '가라, 얼마나 힘을 던 것이냐'라 한 기연이다(조주어록(趙州語錄)/등록(燈錄) 조주장(趙州章))

  30. 古堤和尚 고제화상

    고제(古堤)(고제(古隄)라고도 씀) 화상이다. 오는 승려를 보면 '물러서라,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기연으로 알려졌다. 등사상 계보는 미상이다.

  31. 古堤無佛性 고제무불성

    고제화상(古堤和尚)이 오는 승려를 보면 곧 '물러서라, 물러서라,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기연이다. 뒤에 오직 앙산혜적(仰山慧寂)만이 그 참뜻을 알았다고 한다. '무불성(無佛性)'은 조주구자(趙州狗子) 이래 집착을 깨는 상투어이다.

  32. 靈雲桃花悟道 영운도화오도

    영운지근(靈雲志勤)이 복사꽃을 보고 깨쳐 '자종일견도화후(自從一見桃花後) 직지여금경불의(直至如今更不疑)' 게송을 지음이다(景德傳燈錄)

  33. 玄沙言渠未徹 현사언거미철

    현사사비(玄沙師備)가 영운을 두고 '제당심제당(諦當甚諦當), 감보로형미철재(敢保老兄未徹在)'(아직 사무치지 못했다)라 평함이다

  34. 趙州勘婆 조주감파

    오대산(五臺山) 가는 길목의 한 노파는 길을 묻는 스님마다 '곧장 가시오(驀直去)' 하고는, 스님이 몇 걸음 가면 '멀쩡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는군' 하고 비웃었다. 조주(趙州)가 이 말을 듣고 직접 가서 똑같이 묻고 돌아와 '내가 그대들을 위해 그 노파를 간파했다(勘破了也)'고 했다. 조주가 무엇을 간파했는지를 묻는 공안이다.

  35. 敲門瓦子 고문와자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이다. 문이 열리면 버리는 물건이듯, 조사의 말과 공안(公案)은 깨달음에 들게 하는 방편일 뿐이니 들어간 뒤에는 붙들지 말라는 비유다.

  36. 毫釐有差·天地懸隔 호리유차·천지현격

    삼조(三祖) 승찬(僧璨) 「신심명(信心銘)」의 구절이다

  37. 夾山老子 협산노자

    '협산의 노인'이다. 협산 개산조 협산선회(夾山善會)를 가리킴이 유력하다(민(民)이 협산에서 수학한 점·일상즉도 주제와 호응). 단 원오 자신(협산 주지)의 자칭일 여지도 있다(의심)

  38. 地藏阿師 지장아사

    지장계침(地藏桂琛)(나한계침(羅漢桂琛)), 법안문익(法眼文益)의 스승이다. 일상 작무(종전(種田) 등)를 곧 범행(梵行)으로 보인 선사로 인용된다(추정)

  39. 巖頭全豁 암두전활

    암두전활(巖頭全奯, 828~887)이다. 당나라 선승으로 덕산(德山)의 법을 이었다. 설봉(雪峰)·흠산과 함께 행각한 도반으로, 오산(鰲山)에서 눈에 갇혔을 때 설봉을 일깨웠다. 도적의 칼 앞에서 크게 외치고 입적했다. 원오는 그의 한한지(閑閑地) 법문을 자주 들었다.

  40. 毗盧 비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줄인 말이다. 온 누리에 빛을 비추는 부처로,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나타낸다. 선어록에서는 '비로자나를 넘어선다'처럼 부처의 경지에도 머물지 말라는 뜻으로 쓴다.

  41. 道林 도림

    담주(潭州) 상서(湘西)의 도림사(道林寺)다. 지금의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 땅이다. 원오(圜悟)가 협산(夾山)에 있다가 옮겨 가 머문 절이다.

  42. 丈六金身 장육금신

    한 길 여섯 자(일장육척) 높이의 금빛 부처님 몸이다. 조주(趙州)가 '풀 한 줄기를 장육금신으로 쓰고, 장육금신을 풀 한 줄기로 쓴다'고 한 말이 유명하다.

  43. 示民知庫 시민지고

    지고(知庫) 소임을 맡은 민(民) 선객에게 준 글의 제목이다. 지고는 절의 창고와 살림을 맡는 소임이다. 그는 성도(成都) 대자사(大慈寺) 율사의 법손으로, 율을 배우다가 선으로 돌아섰다.

  44. 錦官 금관

    성도(成都)의 다른 이름인 금관성(錦官城)을 줄인 말이다. 옛날 비단을 맡아보는 관청이 있던 성이라 이렇게 불렀다. 지금의 중국 사천성 성도로, 원오(圜悟)가 머문 소각사(昭覺寺)가 이곳에 있다.

  45. 夾山善會 협산선회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이다. 당나라 선승으로 뱃사공 노릇을 하던 선자덕성(船子德誠)의 법을 이었다. 스승의 노에 맞아 물에 빠졌다가 크게 깨친 일로 이름났다. 그가 머문 예주(澧州) 협산의 절도 '협산'이라 부르며, 뒷날 원오가 이곳에서 『벽암록』을 강설했다.

  46. 筌罤 전제

    고기 잡는 통발(筌)과 토끼 잡는 올무(罤)이다.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는 『장자』의 비유에서 나와, 잠시 빌려 쓰는 방편을 가리킨다. 선에서는 불조의 말씀도 이와 같다고 본다.

  47. 仰山慧寂 앙산혜적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이다. 당나라 선승으로 위산(溈山)의 법을 이었다. 스승과 함께 위앙종(溈仰宗)을 이루었다. 원주(袁州) 앙산에 머물러 앙산이라 불린다.

  48. 民·民禪 민·민선

    원오가 원오심요의 「시민지고」를 지어 준 선객 민이다. 성도(금관) 대자사의 율사 계통에서 출가하여 처음에 사분율을 익혔으나, 남쪽으로 와서 협산에서 원오를 만나 도림 · 장산까지 따르며 참구하였다. 제목의 '지고'는 그가 맡은 소임 이름이다.

  49. 大慈寺 대자사

    성도의 큰 사찰 대자사(大慈寺)다. 소률사(昭律師)의 율맥이 있던 곳이다

  50. 傳法昭律師 전법소률사

    성도 대자사에서 법을 전한 소(昭)율사다. 민(民)의 법조부에 해당하는 율종 승려이며, 특정 실인물은 미상이다

  51. 法孫 법손

    법을 이은 손자뻘 제자다. 민(民)은 소률사(昭律師) 문하의 손제자로 본래 율종 출신이다

  52. 布巾 포건

    율사가 쓰던 베 두건이다. 율종 승려의 표지로, '포건(布巾)을 버림'은 율종을 떠나 선문으로 전향함을 뜻한다

  53. 西來宗旨 서래종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곧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으로 조사선의 근본 종지다

  54. 蔣山 장산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 종산(鍾山)에 있던 절, 장산 태평흥국선원이다. 원오가 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므로, 원오는 자기 문하를 '장산의 문하'라 하고 자기를 '장산 불과'라 부르기도 했다.

  55. 缽袋子 발대자

    발우 주머니다. 조사의 법·의발 전수를 상징하는 선가의 관용어다

  56. 晞顏慕藺 희안모린

    안연(顏淵)(안회(顏回))을 우러르고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함이다. '희안(希顏)'은 어짊을 배움이고(주돈이(周敦頤) 통서(通書)·양웅(揚雄)), '모린(慕藺)'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해 이름을 상여(相如)로 바꾼 고사다(史記)

  57. 觸處逢渠 촉처봉거

    동산양개(洞山良价) 과수오도게(過水悟道偈) '처처득봉거(處處得逢渠), 거금정시아(渠今正是我)'에서 온 표현이다. 닿는 곳마다 본래면목을 만남이다

  58. 淨倮倮·阿轆轆 정라라·아록록

    정나나(淨裸裸)(발가벗은 듯 청정)·아록록지(阿轆轆地)(수레바퀴처럼 걸림 없이 구름)다. 무집착·자재를 뜻하는 선어다

  59. 絕學無爲 절학무위

    영가(永嘉) 「증도가(證道歌)」 첫 구 '절학무위한도인(絕學無爲閑道人)'이다. 배움을 끊고 함이 없는 도인이다

  60. 十成 십성

    완전히 이룸(100%)이다. '천득(薦得)'하면 십성(十成)이고 헤아리면 지견이 생긴다

  61. 信手拈來草 신수염래초

    '거친 밭에 들어 가리지 않고 손 가는 대로 풀을 집음'이다. 활발발한 살활자재의 선구다

  62. 一莖草作丈六金身 일경초작장육금신

    '풀 한 줄기로 열여섯 자 금빛 부처 몸을 짓는다'는 말이다. 뒤에 '부처 몸으로 풀 한 줄기를 짓는다'가 짝으로 붙어, 깨친 이가 하찮은 것과 거룩한 것을 마음대로 바꾸어 쓰는 자재한 작용을 이른다. 조주 스님의 말로 전하며(종용록 제47칙), 원오도 벽암록에서 즐겨 들었다(제4칙 · 제8칙).

  63. 梵行 범행

    brahmacaryā, 청정한 수행이다. 일상 노동을 범행(梵行)으로 본다

  64. 金剛王寶劍當鋒斬斷 금강왕보검당봉참단

    '금강왕 보검으로 칼끝에 닿는 대로 베어 끊는다'는 말이다. 금강왕 보검은 무엇이든 끊어 버리는 가장 굳세고 날카로운 칼로, 임제 스님이 네 가지 할 가운데 하나를 '금강왕 보검 같다'고 한 데서 이름났다(임제록). 망상과 분별을 단번에 끊는 지혜에 빗댄다.

  65. 民禪 민선

    圜悟克勤이 「示民知庫」(『圜悟心要』, X69n1357_p0467a11)를 지어 준 승려. 같은 글에 따르면 成都(錦官) 大慈寺에서 法을 전한 昭律師의 法孫으로 처음 四分律을 배웠고, 남쪽으로 行脚하다 夾山에서 圜悟를 만나 道林까지 따랐으며, 圜悟가 蔣山을 맡은 뒤에도 參扣를 이어 갔다. 心要의 「示民禪人」·「示民上人」의 '民'과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66. 永嘉道 영가도

    永嘉玄覺 「證道歌」의 구절이다

  67. 毫釐有差 호리유차

    三祖 僧璨 「信心銘」의 구절이다

  68. 薦取 천취

    곧바로 알아차려 얻음이다. 사량분별 없이 즉하에 계합함을 뜻하는 선어다

  69.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벌겋게 달아오른 화로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라는 뜻이다. 닿자마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생각과 분별이 일어나는 즉시 녹아 아무 자취도 남지 않는 자리를 견준다. 석두와 장자(長髭)의 문답에서 장자가 한 말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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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비유와 靈雲桃花悟道·趙州勘破臺山婆子 등의 공안은 『圜悟語錄』·『碧巖錄』 계열에서 반복 거론되어, 본문의 압축 인용을 실제 공안으로 동정하는 근거가 된다.

문단 7국역본 대조 4교감 1 · 깊이 읽기에서 봄낱말 69저본 《卍新纂續藏經》

저본

卍新纂續藏經 佛果克勤禪師心要(CBETA 전자판). 국역본 대조는 선림고경총서 국역본과 견준 것으로, 대조에 필요한 구절만 출처를 밝혀 인용합니다.

원문은 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전자판을 따르며 CC BY-NC-SA 3.0 TW(비영리 · 같은 조건)로 싣습니다. 정자 · 표점을 일부 손질했고 고친 곳은 교감에 남겼습니다 — 저작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