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1
자체역은 '截斷'을 독립시키고 '路布葛藤·閑機·破境'을 나란한 목적어로 삼아 벗어남의 대상으로 읽었고, 책은 '截斷(路布葛藤=이론·주장)'·'破(閑機境=기연·경계)'로 붙여 읽었다. 구문 분절만 다를 뿐 부질없는 언구·기연·경계를 끊어 무심에 이른다는 귀결 의미는 동일하므로 양립 가능한 이독이다.
풀이 10
풀이 13
'博'은 사전상 '交易·換取(바꾸다)'의 뜻으로, '以金博金'은 금을 금으로 바꾸어 이질감 없이 하나됨을 나타내는 표준 비유이다. '입히다(鍍)'는 '博'의 자의에 근거가 없으므로, '금을 금으로 바꾸는 것'으로 읽은 자체역이 옳다.
자체역은 '待有'를 '장차 있을 것'으로 보아 '노장께 드릴 편지가 있으리라'로 읽었고, 책은 '待'를 '기다려라'로 보아 '편지가 있으니 기다리라'로 읽었다. '待'의 걸림(장차/기다림) 처리만 다를 뿐 곧 편지를 써 보낸다는 서사 귀결은 동일하므로 양립 가능한 이독이다.
풀이 4
이 대목은 원오가 사대부의 그릇된 태도(진로에 절어 있으면서 진연을 떨쳐낸 뒤에야 나아갈 수 있다고 여김)를 서술·비판하는 문맥이며, 곧이어 '終日行而未嘗行…豈是塵勞之外別有此一段大因緣耶'로 이를 논파한다. 내 번역이 이 비판적 서술을 정확히 옮겼다. 책은 '번뇌로써 수행으로 삼으면 됩니다', '쓸모없는 물건처럼 태워버리고'로 옮겨 원오의 권유로 오독하였고, 爛(무르익다/절다)을 '태워버리다'로, 口以…爲務(입으로 진로를 일삼음)를 처방으로 뒤집어 과의역·오역하였다.
자체역은 '皆是'를 '모두 이것(진연 그대로)'으로 보아 '온갖 인연이 모두 그대로일 뿐 언제 따로 떨쳐 낼 것이 있겠는가'로 읽었고, 책은 '是'를 '옳다'로 보아 '옳지 않음이 없으니'로 읽었다. 문맥상 진연 그대로가 大用이라는 '皆是=모두 그것'이 우세하나, '是=옳다'도 고전 용법상 가능하므로 양립 가능한 이독이다.
이 편의 낱말 43
- 常住本源 상주본원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응하여 천변만화하되 애초에 흔들리지 않는 참성품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생멸(生滅) 없이 늘 머무는[상주(常住)] 근원이라는 뜻이다.
- 截流而證 절류이증
번뇌·망념의 흐름[유(流)]을 단칼에 끊고 곧바로 증득함이다. 머뭇거리며 생각을 굴리면[踟蹰動念] 어긋난다는 대구로 쓰였다. 능엄경(楞嚴經)의 '역류조성(逆流照性)'에서 온 선림(禪林) 상용어다.
- 金剛寶劒 금강보검
어떤 번뇌·분별도 끊어 버리는 금강의 검이다. 반야(般若)의 지혜, 곧 일체견(一切見)을 베어 없애는 자성의 작용을 비유한다.
- 淨倮倮 정라라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깨끗이 발가벗었다는 말이다. 아무것에도 가려지거나 기대지 않은 본래 마음의 맨모습을 그린다. 흔히 정라라적쇄쇄(淨倮倮赤灑灑)로 이어 쓴다.
- 本地風光 본지풍광
본지(本地)는 본래 자리, 풍광(風光)은 경치라는 뜻이다. 남에게서 얻지 않고 사람마다 본래 갖춘 마음자리의 참모습을 이른다. 흔히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짝지어 쓴다.
- 揚眉瞬目·
拈槌豎拂· 양미순목·行杖行喝 염퇴수불· 행장행할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임, 방망이[퇴(槌)]를 잡고 불자(拂子)를 세움, 주장자[장(杖)]를 쓰고 할(喝)을 함이다. 조사들이 말 아닌 몸짓·기용으로 직지한 갖가지 방편의 열거다.
- 敲門瓦子 고문와자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이다. 문이 열리면 버리는 물건이듯, 조사의 말과 공안(公案)은 깨달음에 들게 하는 방편일 뿐이니 들어간 뒤에는 붙들지 말라는 비유다.
- 卽今休去便休去·
若覓了時無了時 즉금휴거편휴거·약멱료시무료시 '지금 당장 쉬면 곧 쉬어지고, 마칠 때를 찾으면 마칠 때가 없다.' 곧바로 쉬어 버리라는 선림(禪林) 상용 격언으로, 원오·대혜의 법어(法語)에 거듭 인용된다.
- 摩竭掩室 마갈엄실
석가모니가 마갈타(摩竭陀)에서 방문을 닫고 말없이 지낸 일이다. 유마가 입을 다문 비야두사(毗耶杜詞)와 짝을 지어, 말을 넘어선 침묵의 본보기로 든다. 승조(僧肇)의 『조론』에서 나온 말이다.
- 枯木朽株 고목후주
마른 나무와 썩은 등걸이라는 말이다. 선문에서는 헛된 생각과 분별이 다 끊겨 크게 한 번 죽은 듯 고요해진 자리를 비유한다. 그 자리에서 다시 큰 작용이 살아나야 한다고 본다.
- 鎮府大王 진부대왕
진주(鎮州)(성덕군(成德軍)) 절도사 조왕(趙王) 王鎔을 가리킨다. 조주(趙州)를 존숭한 재가 호법(護法)으로, 조주가 '이것은 노승이 한평생 다 쓰지 못한 것'이라며 불자(拂子)를 유물로 보낸 대상이다.
- 如水入水·
似金博金 여수입수·사금박금 물이 물에 들어가고 금을 금과 바꾸듯, 깨달음과 근원이 완전히 하나로 계합하여 이질감이 없음을 비유하는 선(禪) 상용어다.
- 襄陽郡將王常侍 양양군장왕상시
양양(襄陽)의 지방관(상시(常侍)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약칭)이다. 위산령우(溈山靈祐)를 참례하고 그 종지를 얻은 재가 법제자다. 서신으로 위산(溈山)·앙산(仰山)과 원상(圓相)을 주고받은 공안의 주인공이다. 개인 이름은 확정하기 어렵다(미령(米嶺) 계열 왕경초(王敬初)와의 혼동에 주의).
- 溈山大圓 위산대원
위산 영우 스님(771~853)이다. 백장 회해 스님의 법을 이었고 위앙종을 연 조사이다. 세상을 떠난 뒤 '대원 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경덕전등록 권9).
- 祖師西來意 조사서래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달마(達磨)가 인도에서 와서 전한 참뜻, 곧 선의 근본을 묻는다. 선문답에서 가장 흔한 물음으로, 조주(趙州)의 '뜰 앞의 잣나무' 답이 이름났다.
- 卽色明心·
附物顯理 즉색명심·부물현리 '색(현상)에 즉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붙여 이치를 드러낸다'—승려가 위산(溈山)의 수불(豎拂)을 교학적으로 풀이한 말이다. 왕상시는 이 알음알이식 헤아림을 '무엇을 그리 죽기 살기로 서두르는가'라며 물리친다.
- 仰山慧寂 앙산혜적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이다. 당나라 선승으로 위산(溈山)의 법을 이었다. 스승과 함께 위앙종(溈仰宗)을 이루었다. 원주(袁州) 앙산에 머물러 앙산이라 불린다.
- 圓相 원상
둥근 원을 그려 진리나 깨달음의 자리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이다. 위앙종에서 특히 즐겨 썼다.
- 終日行而未嘗行·
終日用而未嘗用 종일행이미상행·종일용이미상용 '종일 다녀도 다닌 적 없고 종일 써도 쓴 적 없다.' 진로(塵勞)의 작용 그대로가 곧 무위(無爲)의 대용(大用)임을 나타내는 선림(禪林) 관용구다. 진사(塵事) 밖에 따로 대인연(大因緣)이 없음을 논증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 大寶聚·
大寶光 대보취·대보광 크나큰 보배 무더기와 그 광명이다. 본래 갖춘 자성의 무진한 공덕·작용을 비유한다. 그 위에서 광명(光明)을 놓고 있으면서도 밖을 향해 구함[외구(外求)]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 三界火宅 삼계화택
삼계(三界)는 중생이 나고 죽으며 떠도는 온 세계다. 『법화경』은 이 세계가 온갖 괴로움으로 들끓는 모습을 불타는 집에 빗대었다. 그 안에 있으면서도 위태로운 줄 모르는 중생을 일깨우는 비유다.
- 佛子住此地 불자주차지
『법화경(法華經)·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제21)』의 게송이다. '불자(佛子)가 이 자리에 머물면 곧 부처의 수용(受用)이니, 거닐거나 앉거나 누우나 늘 그 가운데 있느니라.' 원오는 이를 결어로 삼아 일상 그대로가 불(佛)의 수용처(受用處)임을 결론짓는다.
- 趙州從諗 조주종심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이다. 당나라의 선승으로 남전(南泉)의 법을 이었다. 조주 땅 관음원(觀音院)에 오래 머물러 '조주'라 불렸고, 120세를 살았다고 전한다. 쉬운 말로 사람을 일깨웠으니,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같은 문답이 널리 알려졌다.
- 本來面目 본래면목
본디 그대로의 제 참모습, 곧 분별 이전의 참 나를 이른다. 육조 혜능(慧能)이 혜명(惠明)에게 한 물음에서 널리 퍼졌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 그때, 무엇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 如水入水 여수입수
물이 물에 들어가듯, 둘 사이에 아무 틈이나 자취 없이 하나로 들어맞음을 이른다. 흔히 ‘금을 금과 맞바꾼다’는 말과 짝지어, 깨달음이 본래 자리와 꼭 맞는 모습을 그린다.
- 活鱍鱍 활발발
물고기가 펄떡펄떡 뛰듯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양이다. 말이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깨친 마음을 그린다. 활발발(活潑潑)이라고도 쓴다.
- 毗耶杜詞 비야두사
유마거사가 비야리(毗耶離)에서 입을 다문 일을 이른다. 『유마경』에서 문수가 둘 아닌 법문을 묻자 유마는 말없이 잠잠했다. 석가의 마갈엄실(摩竭掩室)과 짝을 지어 침묵의 본보기로 든다.
- 維摩大士 유마대사
유마힐(維摩詰) 거사를 높여 이른 말이다. 부처님 당시 비야리성에 살던 재가 보살로, 『유마경』의 주인공이다. 병문안 온 문수(文殊) 보살에게 침묵으로 '둘 아닌 법문'을 보였다. 세속에 살며 도를 이룬 거사의 본보기로 꼽힌다.
- 溈山靈祐 위산영우
위산영우(溈山靈祐, 771~853)이다. 당나라의 선승으로 백장(百丈) 스님의 법을 이었다. 담주(潭州) 위산에 머물며 제자 앙산(仰山)과 함께 위앙종을 열었다. 시호는 대원(大圓) 선사이다.
- 瞬目揚眉 순목양미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치켜올린다는 말이다. 선승이 말 대신 몸짓으로 뜻을 보이던 방편을 이른다. 마조(馬祖)가 약산(藥山)에게 '어떤 때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게 한다'고 한 문답으로 널리 알려졌다.
- 蔣待制 장대제
원오가 법어를 써 준 장씨 성의 고위 관료로, 그 글이 원오심요에 실려 있다. 대제는 송나라 때 용도각 · 천장각 같은 전각에 딸려 황제를 가까이 모시던 벼슬이다. 누구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 廻光返照 회광반조
밖으로 내달리던 빛을 돌이켜 제 마음을 되비춘다는 말이다. 바깥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아 본래 마음을 보라는 선 수행의 요긴한 말로, 임제 스님이 쓰고 원오도 즐겨 썼다.
- 五蘊身田 오온신전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을 밭[전(田)]에 비유한 말이다. 그 몸 그대로가 참마음이 작용하는 자리임을 나타낸다.
- 無盡藏 무진장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창고다. 본래 갖춘 청정묘심을 비유한다. 뒤의 여의주(如意珠)·금강보검(金剛寶劒)과 함께 자성의 세 비유로 병렬된다.
- 如意珠 여의주
뜻대로 온갖 보배를 내는 구슬(摩尼珠)이다. 온갖 작용을 다 내는 본심(本心)의 비유다.
- 信根 신근
오근(五根)(신(信)·진(進)·염(念)·정(定)·혜(慧))의 하나다. '이것이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님[불종타득(不從他得)]'을 확신하는 믿음의 뿌리다. 원오·대혜 계열 간화(看話)에서 신근이 수행의 출발로 강조된다.
- 路布葛藤 노포갈등
늘어놓은 말의 얽힘이다. 갈등(葛藤)은 칡·등나무처럼 얽힌 언구(言句)·공안(公案)을 뜻하는 선(禪) 은어다. 노포(路布)는 노포(露布)(펼쳐 드러냄)의 표기로 보이며, 부질없이 벌여 놓은 언설을 가리킨다.
- 現量 현량
불교 논리학에서 앎을 얻는 세 길 가운데 하나로, 생각으로 따지지 않고 눈앞의 대상을 곧바로 아는 것이다.
- 卽今休去便休去 즉금휴거편휴거
'지금 당장 쉬면 곧 쉬어지고, 마칠 때를 찾으면 마칠 때가 없다.' 곧바로 쉬어 버리라는 禪林 상용 격언으로, 원오·대혜의 法語에 거듭 인용된다.
- 卽色明心 즉색명심
'색(현상)에 즉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붙여 이치를 드러낸다'—승려가 溈山의 豎拂을 교학적으로 풀이한 말이다. 왕상시는 이 알음알이식 헤아림을 '무엇을 그리 죽기 살기로 서두르는가'라며 물리친다.
- 終日行而未嘗行 종일행이미상행
'종일 다녀도 다닌 적 없고 종일 써도 쓴 적 없다.' 塵勞의 작용 그대로가 곧 無爲의 大用임을 나타내는 禪林 관용구다. 塵事 밖에 따로 大因緣이 없음을 논증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 大寶聚 대보취
크나큰 보배 무더기와 그 광명이다. 본래 갖춘 자성의 무진한 공덕·작용을 비유한다. 그 위에서 光明을 놓고 있으면서도 밖을 향해 구함[外求]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 法華云 법화운
『法華經·如來神力品(제21)』의 게송이다. '佛子가 이 자리에 머물면 곧 부처의 受用이니, 거닐거나 앉거나 누우나 늘 그 가운데 있느니라.' 원오는 이를 결어로 삼아 일상 그대로가 佛의 受用處임을 결론짓는다.
저본
卍新纂續藏經 佛果克勤禪師心要(CBETA 전자판). 국역본 대조는 선림고경총서 국역본과 견준 것으로, 대조에 필요한 구절만 출처를 밝혀 인용합니다.
원문은 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전자판을 따르며 CC BY-NC-SA 3.0 TW(비영리 · 같은 조건)로 싣습니다. 정자 · 표점을 일부 손질했고 고친 곳은 교감에 남겼습니다 — 저작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