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초감

역주 · 원오심요 · 下권 21편

영상인(英上人)에게 주는 글

示英上人

영상으로 보기 →

21.1
한문道妙至簡至易,誠哉是言。未達其源者,以謂至淵至奧,在空劫已前,混沌未分,天地未成立,杳冥恍惚,不可窮,不可究,不可詰,唯聖人能證能知。
번역도(道)의 오묘함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 근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여긴다. 도는 지극히 깊고 지극히 그윽하여, 공겁(空劫) 이전, 혼돈이 아직 갈라지지 않고 하늘과 땅이 아직 서지 않은 때에 있다. 아득하고 어두우며 황홀하여, 다할 수도 없고 파고들 수도 없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오직 성인만이 깨달아 알 수 있다.
是故誠其言,不識其歸趣,安可以語此事哉?
그리하여 그 말은 참되다 여기면서도 그 돌아가는 곳(歸趣)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야 어찌 이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殊不知人人根腳下圓成,只日用之中,淨倮倮地,被一切機,徧一切處,無幽不燭,無時不用。
사람마다 제 발밑에 원만히 이루어져 있음(圓成)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다만 날마다 쓰는 가운데 깨끗이 발가벗은 그대로(淨倮倮地), 온갖 기틀에 미치고 온갖 곳에 두루 한다. 그윽한 데라고 비추지 않는 곳이 없고, 쓰이지 않는 때가 없다.
但以背馳既久,強生枝節,不肯自信,一向外覓,所以轉覓轉遠。
다만 등지고 달아난 지 이미 오래라, 억지로 가지와 마디를 만들어 낸다. 스스로 믿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밖으로만 찾는다. 그래서 찾을수록 더 멀어진다.
쉽게 읽기도의 오묘함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 근원에 이르지 못한 이는 이렇게 여긴다. 도란 지극히 깊고 지극히 그윽하여, 공겁 이전 곧 혼돈이 아직 갈라지지 않고 천지가 아직 서지 않았을 때에 있다고. 또 아득하고 어두우며 황홀하여, 다할 수도 파고들 수도 따져 물을 수도 없어, 오직 성인만이 증득하고 알 수 있다고. 그리하여 그 말은 참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돌아갈 곳은 알지 못한다. 이래서야 어찌 이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마다 제 발밑에서 도는 이미 원만히 이루어져 있다. 날마다 쓰는 일상 가운데 깨끗하고 발가벗은 그대로 온갖 기틀에 응하고 온갖 곳에 두루 미친다. 그윽한 데도 비추지 못함이 없고, 어느 때든 쓰이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다만 등지고 달아난 지 이미 오래되어, 억지로 가지와 마디를 만들어 낸다. 스스로를 믿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밖으로만 찾는다. 그러니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풀이 4
杳冥恍惚 묘명황홀'不可窮 不可究 不可詰'은 『老子』 제14장 '此三者不可致詰'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보인다(추정).
空劫 공겁'以謂至淵至奧,在空劫已前,混沌未分…唯聖人能證能知'—도를 空劫已前의 아득한 곳에 두는 견해를 들어 깨뜨리고, 도는 사람마다 발밑에 圓成해 있다고 잇는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是故誠其言,不識其歸趣,安可以語此事哉'—誠其言은 첫머리 '道妙至簡至易'라는 말을 진실로 여김이고 不識其歸趣는 그 귀결처를 모름이니, 미달자의 상태를 두고 원오가 비평하는 말이다. 자체역은 이를 원오 자신의 비평으로 처리했고, 출판본은 앞 '以謂…'의 인용 안에 넣어 닫음표를 뒤로 미뤘다. 구두점에 따라 갈리는 양립 이독이며, 誠其言의 주체와 논지상 원오의 비평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다.
21.2
한문是故達磨西來,唯言直指人心而已。此心卽平常無事之心,天機自張,無拘無執,靡住靡著,與天地齊德,日月合明,鬼神同吉凶,無容立毫髮見刺。
번역그러므로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直指人心)’고만 말씀하셨다. 이 마음은 곧 평상의 일 없는 마음(平常無事之心)이다. 하늘의 기틀(天機)이 저절로 펼쳐져, 얽매임도 붙잡음도 없고, 머묾도 달라붙음도 없다. 하늘땅과 덕을 나란히 하고, 해와 달과 밝음을 합하며, 귀신과 길흉을 같이한다. 털끝만 한 견해나 가시(見刺)라도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唯蕩然大通,契合無心,無爲無事,若立纖芥能所,彼我卽隔礙,永不通透。
오직 툭 트여 크게 통하여(蕩然大通) 무심(無心)에 딱 맞으니, 함도 없고 일도 없다. 티끌만 한 능소(能所)라도 세우면, 저와 나가 곧 막히고 걸려 영영 꿰뚫어 통하지 못한다.
쉽게 읽기그러므로 달마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고만 말씀하셨다. 이 마음은 곧 평상의 일 없는 마음이다. 하늘이 낸 신묘한 작용이 저절로 펼쳐져, 얽매임도 집착도 없고 머무름도 달라붙음도 없다. 천지와 더불어 덕을 나란히 하고, 해와 달과 밝음을 함께하며, 귀신과 길흉을 같이한다. 그러니 털끝만 한 견해나 가시도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오직 툭 트여 크게 통하여 무심에 딱 들어맞으니, 함도 없고 일도 없다. 만약 티끌만 한 능소, 곧 아는 나와 알려지는 대상이라는 나눔이라도 세운다면, 저와 나가 곧 막히고 걸려 영영 통해 사무치지 못한다.
풀이 4
能所 능소같은 짜임의 말이 『圜悟語錄』 권15에도 '箇中若立一絲毫能所見刺,則重過山嶽'으로 보인다.
平常無事之心 평상무사지심'達磨西來,唯言直指人心而已。此心卽平常無事之心'은 直指人心의 '心'을 平常無事之心으로 바로 풀었다.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日月合明
. 周易 乾卦 文言傳 '與日月合其明'의 축약으로, 주체인 사람이 해·달과 그 밝음을 합한다는 뜻이다. 앞뒤 齊德·同吉凶과 같은 '주체+대상+합/제/동' 구문이다. 출판본 '일월은 합당히 밝으며'는 合을 '합당'으로 오독해 주객을 뒤집고 병렬구조를 깬 오역이다. '해와 달과 밝음을 합하며'가 옳다.
21.3
한문所謂無明實性卽佛性,幻化空身卽法身。
번역이른바 ‘무명의 참 성품(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다’라는 것이다.
若能無明殻子裏證得實性,餉間無明全體一時發揮;幻化空身窠窟中見法身,餉間空身全體都盧瑩徹。
무명의 껍질 속에서 참 성품을 깨달으면, 잠깐 사이에 무명 전체가 한꺼번에 드러난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의 굴속에서 법신을 보면, 잠깐 사이에 빈 몸 전체가 모조리 환히 사무친다.
第恐於無明空身中作爲立見,則沒交涉也。
다만 무명과 빈 몸 속에서 무엇을 지어 견해를 세울까 걱정이다. 그러면 아무 상관이 없다.
既透此正體,無明空身無別發明,則一切萬有,大地山河,明暗色空,四聖六凡,皆非外物。
이 바른 본체(正體)를 이미 꿰뚫었다면, 무명과 빈 몸에 따로 밝혀낼 것이 없다. 그러면 온갖 있는 것들, 대지와 산하, 밝음과 어둠, 색과 공, 네 성인과 여섯 범부(四聖六凡)가 모두 바깥 사물이 아니다.
쉽게 읽기이른바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다'라는 것이다. 무명의 껍질 속에서 참성품을 증득하면, 잠깐 사이에 무명의 온전한 전체가 한꺼번에 드러난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의 굴 속에서 법신을 보면, 잠깐 사이에 빈 몸의 온전한 전체가 모조리 환하게 사무친다. 다만 무명과 빈 몸 가운데서 무언가를 지어내어 견해를 세울까 염려된다. 그리하면 아무 교섭도 없어지고 만다. 이 바른 본체를 이미 꿰뚫어 통하면, 무명과 빈 몸에 따로 밝혀낼 것이 없다. 곧 온갖 것과 대지와 산하, 밝음과 어둠, 색과 공, 성인의 네 세계와 범부의 여섯 세계가 모두 밖의 사물이 아니다.
풀이 3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 영가현각(永嘉玄覺) 『증도가(證道歌)』(『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0 수록)의 원구를 원오가 그대로 끌어와 번뇌즉보리를 논증한 것으로, 원오 어록·심요에서 반복 인용되는 정형 전거이다.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永嘉玄覺 『證道歌』(『景德傳燈錄』 卷30 수록)의 원구를 원오가 그대로 끌어와 번뇌즉보리를 논증한 것으로, 원오 어록·심요에서 반복 인용되는 정형 전거이다.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無明空身'—앞의 無明(殻子)·幻化空身 두 축을 이어받은 축약형이다. 자체역은 '무명과 빈 몸'의 두 항으로, 출판본은 '무명의 부질없는 몸'의 한 항(無明之空身)으로 읽었다. 문맥상 두 항으로 봄이 더 정합하나 통사상 한 항 독해도 불가능치 않은 양립 이독이다.
21.4
한문真實諦當,則二六時中,大方無外,何處不爲自己放下身心處?
번역참으로 딱 들어맞으면, 하루 열두 때 가운데 큰 방위에 바깥이 없다(大方無外). 어느 곳인들 제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豈不見古者道:塵勞之儔,爲如來種。觀身實相,觀佛亦然。
보지 못했는가. 옛사람이 말했다. “번뇌의 무리(塵勞之儔)가 여래(如來)의 씨앗이 된다. 몸의 실상을 살피듯, 부처를 살피는 것도 그러하다.”
然後世法佛法打成一片,等閑喫飯著衣,卽是大機大用,則行棒行喝,百千作爲機境,豈更疑著?
그런 뒤에야 세간법과 불법이 한 덩어리가 된다(打成一片). 예사로 밥 먹고 옷 입는 것이 곧 큰 기틀 큰 작용(大機大用)이다. 그렇다면 방망이를 쓰고 할을 하는 것(行棒行喝)과 백천 가지 짓는 일이 다 기틀이요 경계인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하겠는가?
若達此,自腳跟下至簡至易,道妙無量法門一時開現,透脫生死,成勝妙果,豈有難哉?
이를 사무쳐 알면, 제 발꿈치 아래부터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 도의 오묘함과 한량없는 법문(法門)이 한꺼번에 열려 드러난다. 생사를 꿰뚫어 벗어나고, 뛰어나고 오묘한 열매(勝妙果)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쉽게 읽기진실로 딱 들어맞으면, 열두 때 가운데 큰 방위에 바깥이 없다. 그러니 어느 곳인들 제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어찌 옛사람의 말을 보지 못하는가. '번뇌의 무리가 여래의 종자가 되나니, 몸의 실상을 관하고 부처를 관함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 뒤에야 세간의 법과 부처의 법이 한 조각으로 어우러진다. 예사로이 밥 먹고 옷 입는 것이 그대로 큰 기틀이요 큰 작용이 된다. 그렇다면 방망이를 쓰고 할을 하며 백천 가지 행위가 기틀과 경계가 되는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하겠는가. 이를 통달하면 제 발꿈치 아래로부터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워진다. 도의 오묘함과 한량없는 법문이 한꺼번에 열려 드러난다. 그리하여 나고 죽음을 꿰뚫어 벗어나고, 뛰어나고 오묘한 과보를 이룬다.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풀이 7
觀身實相觀佛亦然 관신실상관불역연'古者道' 아래 佛道品의 '塵勞之儔爲如來種'에 이어 든 '觀身實相,觀佛亦然'은 『維摩經』 見阿閦佛品 제12의 '如自觀身實相,觀佛亦然'이다.
大機大用 대기대용'然後世法佛法打成一片,等閑喫飯著衣,卽是大機大用' — 세간법과 불법이 한 조각이 된 뒤의 일상을 大機大用으로 보고, 이어 '行棒行喝'도 모두 機境이라 한다.
機境 기경'等閑喫飯著衣,卽是大機大用,則行棒行喝,百千作爲機境'—世法·佛法이 打成一片하면 일상의 動作과 棒喝이 모두 접인의 機境이 된다는 긍정의 쓰임이다.
大機大用 대기대용「대기대용(大機大用)」·「행봉행할(行棒行喝)」— 덕산봉(德山棒)·임제할(臨濟喝)을 대기대용의 전형으로 드는 어법은 원오 『벽암록(碧巖錄)』 여러 칙의 수시(垂示)·평창(예: 덕산(德山)·임제(臨濟) 관련 칙)과 동일한 임제종 상용 표현이다.

下권 차례 (72편)

이 편의 낱말 35
  1. 道妙至簡至易 도묘지간지역

    '도의 오묘함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는 말이다. 도는 아득하고 깊은 데 있지 않고 저마다의 발밑에 있다는 뜻이다. 원오가 영상인에게 써 준 글(원오심요)의 첫머리와 끝에 거듭 나온다.

  2. 混沌未分·天地未成立 혼돈미분·천지미성립

    혼돈이 아직 갈라지지 않고 천지가 아직 서지 않은 태초이다. 장자(莊子)·열자(列子) 계열의 우주 발생론적 표현으로, '공겁이전(空劫已前)'과 짝을 이루어 도를 시공 이전의 지극히 그윽한 것으로만 여기는 미달의 견해를 묘사한다.

  3. 杳冥恍惚 묘명황홀

    아득하고 어두우며 흐릿하여 붙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노자(老子)』가 도(道)를 그린 말에서 왔다. 원오는 도를 이런 신비한 곳에 두는 견해를 물리칠 때 이 말을 썼다.

  4. 根腳下圓成 근각하원성

    '발밑에서 이미 원만히 이루어져 있다.' 근각하(根腳下)는 각자의 발밑, 곧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이다. 원성(圓成)은 원만성취로, 도가 밖이 아니라 사람마다 일용 가운데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뜻한다.

  5. 淨倮倮 정라라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깨끗이 발가벗었다는 말이다. 아무것에도 가려지거나 기대지 않은 본래 마음의 맨모습을 그린다. 흔히 정라라적쇄쇄(淨倮倮赤灑灑)로 이어 쓴다.

  6. 被一切機·徧一切處 피일체기·편일체처

    온갖 기틀(機)에 응하고 온갖 곳(處)에 두루 미침이다. 편(徧)은 편(遍)의 통용자이다. 본래 성품이 어느 때·어느 곳에서도 작용하지 않음이 없음(무시불용(無時不用)·무유불촉(無幽不燭))을 말한다.

  7. 祖師西來 조사서래

    조사(祖師) 달마(達磨)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일이다. 선에서는 그 뜻을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 데 둔다. 그 뜻을 묻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선문의 대표적인 물음이다.

  8. 直指人心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는 말이다. 경전의 글이나 이치를 거치지 않고 제 마음을 바로 짚어 깨닫게 한다. 흔히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이어 써서 달마(達磨)가 전한 선의 요지로 삼는다.

  9. 平常無事之心 평상무사지심

    꾸미거나 일을 만들지 않는 평소 그대로의 마음, 일 없는 마음이다. 마조 스님이 '평상심이 곧 도'라 하고, 조주가 도를 묻자 남전 스님이 '평상심이 도'라고 답한 문답(무문관 제19칙)과 뜻이 이어진다.

  10. 天機自張 천기자장

    천기(天機)가 저절로 펼쳐짐이다. 천기(天機)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기기욕심자(其耆欲深者), 기천기천(其天機淺)'에서 온 말로 자연히 발동하는 신묘한 작용이다. 인위(拘·집(執)·주(住)·저(著))를 더하지 않아 본래의 기틀이 스스로 열림을 뜻한다.

  11. 與天地齊德·日月合明 여천지제덕·일월합명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부대인자(夫大人者),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의 축약·변용이다. 무심에 계합한 경지를 유가의 대인 형상을 빌려 그린 것으로, 선에서 삼교 어휘를 회통해 쓰는 전형적 용례이다.

  12. 都盧瑩徹 도로영철

    남김없이 모조리(都盧) 환하게 사무침(瑩徹)이다. 도로(都盧)는 '전부·모두'를 뜻하는 구어로 도래(都來)와 같다. 영(瑩)은 옥처럼 맑게 빛남이니, 빈 몸(空身)의 전체가 통째로 투명하게 밝아짐을 형용한다.

  13. 大方無外 대방무외

    큰 방위(方)에는 바깥이 없음이다. 장자(莊子) 천하(天下)편 '지대무외(至大無外), 위지대일(謂之大一)'에 바탕한 표현으로, 온 우주가 자기 아님이 없어 어디든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放下身心) 자리라는 뜻으로 전용된다.

  14. 放下身心 방하신심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내려놓음이다. 아상(我相)과 집착을 통째로 방하하는 것으로, 선 수행의 요체를 이르는 상용어이다.

  15. 塵勞之儔·爲如來種 진로지주·위여래종

    '번뇌의 무리가 여래의 씨앗이 된다'는 말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 가섭이 문수의 설법에 감탄하며 한 말이다. 번뇌를 떠나 따로 깨달음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16. 觀身實相·觀佛亦然 관신실상·관불역연

    『유마힐경(維摩詰經)』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 '여자관신실상(如自觀身實相), 관불역연(觀佛亦然)(자기 몸의 실상을 관하듯 부처를 관함도 그러하다)'의 인용이다. 앞의 '진로지주위여래종(塵勞之儔爲如來種)'과 함께 원오가 '고자도(古者道)'로 묶어 든 유마경 두 구절이다.

  17. 大機大用 대기대용

    큰 기틀과 큰 작용이다. 깨달은 이의 근본 힘과, 그 힘이 걸림 없이 쓰이는 것을 함께 이른다. 황벽(黃檗)이 스승 백장(百丈)의 이야기를 듣고 '마조(馬祖)의 대기대용을 보았다'고 한 말이 유명하다.

  18. 行棒行喝 행방행할

    방(棒)을 쓰고 할(喝)을 한다는 말이다. 몽둥이로 치고 크게 소리쳐, 말과 생각에 매인 학인을 단번에 깨우치는 수단이다. 덕산(德山)의 방과 임제(臨濟)의 할이 이름났다.

  19. 機境 기경

    기(機)는 스승이 내보이는 마음의 작용과 솜씨, 경(境)은 그때 드러내 보이는 사물과 장면이다. 가르침의 수단을 두루 이르나, 거기에 붙들려 알음알이를 지으면 병이 된다.

  20. 二六時中 이육시중

    하루 열두 때 내내, 곧 온종일·언제나를 이른다. 옛날에는 하루를 열두 때로 나누었고, 이육(二六)은 2×6=12를 말한다. 선어록에서 일상의 모든 순간을 가리킬 때 늘 쓴다.

  21. 打成一片 타성일편

    여럿이 한 덩어리로 뭉쳐 틈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공부가 무르익어,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세상일과 불법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지를 이른다.

  22. 能所 능소

    주관과 객관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능(能)은 보고 아는 쪽이고, 소(所)는 보이고 알려지는 쪽이다. 선에서는 이렇게 둘로 가르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깨침에 걸림이 된다고 본다.

  23. 見刺 견자

    '견해의 가시'라는 말이다. 조금이라도 제 견해나 알음알이를 세우면 그것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걸림이 된다는 비유다.

  24. 餉間 향간

    잠깐 사이라는 말이다. ‘향(餉)’은 끼니로, 밥 한 끼 먹을 만한 짧은 동안을 뜻한다. 일향(一餉)이라고도 한다.

  25. 空劫 공겁

    세계가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비는 네 시기 가운데, 무너진 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시기다. 선문에서는 '공겁 이전'이라 하여 천지가 생기기 전의 본래 자리를 가리킨다.

  26. 英上人 영상인

    원오가 법어를 써 준 승려 영으로, 그 글이 원오심요에 실려 있다. '상인'은 지혜와 덕을 갖춘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27. 蕩然大通·契合無心 탕연대통·계합무심

    툭 트여 크게 통하여 무심에 꼭 들어맞음이다. 탕연(蕩然)은 텅 비어 걸림 없는 모양이다. 능소(能所)를 세우지 않는 무심의 자리를 도의 귀결로 제시한다.

  28. 無明實性卽佛性·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환화공신즉법신

    영가현각 스님의 「증도가」 앞머리 구절이다. 어리석음(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고,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는 뜻으로,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을 담았다.

  29. 四聖六凡 사성육범

    십법계(十法界)의 구분이다. 사성은 불·보살·연각·성문, 육범은 천·인·아수라·축생·아귀·지옥이다. 성범·색공·명암이 모두 밖의 사물이 아님(皆非外物)을 말해 만법귀일을 드러낸다.

  30. 被一切機 피일체기

    온갖 기틀(機)에 응하고 온갖 곳(處)에 두루 미침이다. 徧은 遍의 통용자이다. 본래 성품이 어느 때·어느 곳에서도 작용하지 않음이 없음(無時不用·無幽不燭)을 말한다.

  31. 與天地齊德 여천지제덕

    周易 乾卦 文言傳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의 축약·변용이다. 무심에 계합한 경지를 유가의 대인 형상을 빌려 그린 것으로, 선에서 삼교 어휘를 회통해 쓰는 전형적 용례이다.

  32.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

    永嘉玄覺 『證道歌』의 구절 '無明實性即佛性,幻化空身即法身'(T48n2014_p0395c10; 『景德傳燈錄』 권30, T51n2076_p0460a16). 無明의 참 성품이 곧 佛性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法身이라 하여, 煩惱卽菩提·生死卽涅槃의 뜻을 드러낸다.

  33. 觀身實相 관신실상

    『維摩詰經』 見阿閦佛品 '如自觀身實相, 觀佛亦然(자기 몸의 실상을 관하듯 부처를 관함도 그러하다)'의 인용이다. 앞의 '塵勞之儔爲如來種'과 함께 원오가 '古者道'로 묶어 든 유마경 두 구절이다.

  34. 垂示 수시

    스승이 學人에게 가르침을 드리워 보임. 『碧巖錄』에서는 圜悟가 本則 앞에 붙인 짧은 서두 법어로 '垂示云'으로 시작한다(제1칙 '垂示云。隔山見煙。早知是火…', T48n2003_p0140a12).

  35. 觀身實相觀佛亦然 관신실상관불역연

    '몸의 참모습을 보듯이 부처도 그렇게 본다'는 말이다. 『유마경』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에서 유마힐(維摩詰)이 부처를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 답한 구절로, 부처를 제 몸의 실상 밖에서 따로 찾지 않음을 이른다.

문단 4국역본 대조 3 · 깊이 읽기에서 봄낱말 35저본 《卍新纂續藏經》

저본

卍新纂續藏經 佛果克勤禪師心要(CBETA 전자판). 국역본 대조는 선림고경총서 국역본과 견준 것으로, 대조에 필요한 구절만 출처를 밝혀 인용합니다.

원문은 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전자판을 따르며 CC BY-NC-SA 3.0 TW(비영리 · 같은 조건)로 싣습니다. 정자 · 표점을 일부 손질했고 고친 곳은 교감에 남겼습니다 — 저작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