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초감

역주 · 원오심요 · 下권 70편

한조의(韓朝議)에게 드리는 글

示韓朝議

70.1
한문乃佛乃祖直指此大法,於人人跟腳下洞照,如千日並出,
번역부처와 조사(祖師)께서 이 큰 법을 곧바로 가리켜 보이십니다. 이 법은 사람마다 발밑에서 환히 비춥니다. 마치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오른 것과 같습니다.
但趣外奔逸,久不能自信有如是大威德光明,唯務作聦明、立知見,向業惑中以謂出乎等𢑱衒耀自得,
그런데 밖으로만 내달리느라, 제게 이렇게 크나큰 위덕(威德)의 광명이 있음을 오래도록 스스로 믿지 못합니다. 오직 총명을 부리고 지견(知見)을 세우는 데만 힘씁니다. 업과 미혹 속에서 제가 또래보다 뛰어나다 여기고, 뽐내며 스스로 흡족해합니다.
向人間世所習古今博究廣觀謂窮極底蘊,殊不知螢火之光豈比太陽?
세상에서 익힌 것으로 옛날과 지금을 널리 파고들고 두루 살펴, 밑바닥까지 다 캤다고 여깁니다. 반딧불의 빛이 어찌 태양에 견주겠습니까. 이것을 전혀 모릅니다.
所以古之奇傑之士、頴脫之性,就近而論,如裴相國、楊大年之儔投誠放下,就宗師決擇剗去浮塵知見,大徹大悟始能超軼,與老禪碩德抗行履踐,
그러므로 옛날의 뛰어나고 걸출한 선비, 남달리 빼어난 성품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가까운 예를 들면 배휴 상국(裴相國)과 양대년(楊大年)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내려놓고, 종사(宗師)께 나아가 가려 판가름(決擇)을 받아 뜬 티끌 같은 지견을 깎아 냈습니다. 크게 사무치고 크게 깨닫고서야 비로소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련한 선사와 큰 덕을 갖춘 이들과 나란히 걸으며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到臨合殺結角頭自解撒手,克證大解脫,豈小事哉?
마지막 매듭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풀고 손을 놓아, 크나큰 해탈을 증득하였습니다.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쉽게 읽기부처와 조사가 이 큰 법을 곧바로 가리켜 보이십니다. 이 법은 사람마다 제 발밑에서 환히 빛납니다. 마치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밖으로만 내달립니다. 그래서 제 안에 이렇게 크나큰 위덕의 광명이 있는 줄을 오래도록 스스로 믿지 못합니다. 오직 총명함을 부리고 지견을 세우는 데만 힘씁니다. 업과 미혹 속에서 제가 남들보다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랑하고 뽐내며 스스로 흡족해합니다. 또 세상에서 배운 것으로 옛일과 지금 일을 널리 파고들었다고 여깁니다. 밑바닥까지 다 캐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반딧불이 어찌 태양에 견주겠습니까. 그래서 옛날의 뛰어나고 걸출한 선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달리 빼어난 성품을 지닌 이들 말입니다. 가까운 예로 배휴 상국이나 양대년 같은 이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사에게 나아가 결택을 받았습니다. 결택이란 바르게 가려서 판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뜬 티끌 같은 지견을 깎아 없앴습니다. 크게 사무치고 크게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련한 선사, 큰 덕을 갖춘 이들과 나란히 어깨를 걸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매듭에 이르러 스스로 그 매듭을 풀고 손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크나큰 해탈을 증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풀이 2
裴休 배휴배휴(裴休)(배상국(裴相國))의 참문 인연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 황벽희운장(黃檗希運章)과 황벽전심법요(黃檗傳心法要) 서문에 배휴가 종사에게 나아가 결택·오도한 기록이 있으며, 원오는 이를 재가 사대부(양억과 짝)의 전형적 모범으로 인용한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原文'到臨合殺結角頭自解撒手'→‘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 이독. 合殺(악곡의 최후 매듭)과 結角頭(마지막 관문)를 '마지막 결착에 이르러 스스로 매듭을 풀고 손을 놓아'로 직역한 것과, '납월 삼십일에 다다르면 손을 놓아'로 선문 상투 은유(섣달 그믐=사멸의 최후 고비)로 의역한 것이 모두 최후의 결정적 고비를 지시하여 양립한다. 다만 책은 結角頭自解의 뉘앙스가 축약되고 원문에 없는 '납월 삼십일'을 끌어온 점에서 과의역 쪽으로 기운다. 어느 한쪽을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어 ‘두 읽기가 다 성립함’로 유지한다.
70.2
한문今既明敏不減前輩,平時學業才力邁往於世路,
번역이제 그대는 밝고 민첩함이 이미 선배들에 못지않습니다. 평소의 학업과 재주와 역량도 세상길에서 남보다 앞섭니다.
久之雖知宗門有此段緣,謂不出我所宗尚,殊不著意以夙昔大緣相值歐峯,經年會聚,一聞舉揚卽起深信,迴光返照顧人間世,如夢如幻隨大化變滅,乃虗妄爾。
오래전부터 종문(宗門)에 이런 인연이 있는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드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겨, 도무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옛적의 큰 인연으로 구봉(歐峯)에서 만나 여러 해를 함께 모이다가, 종지를 들어 보이는 것을 한 번 듣고 곧 깊은 믿음을 일으켰습니다. 빛을 돌이켜 되비추어(迴光返照)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꿈같고 허깨비 같았습니다. 큰 조화를 따라 변하고 스러지니, 헛되고 거짓될 뿐이었습니다.
唯此千劫不壞不移易一切聖賢根本,乃造物之淵源,印定自己,若一發明七通八達,何往不自得哉?
오직 이것, 천 겁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고 옮겨 바뀌지 않는 것이 모든 성현의 근본입니다. 만물을 지어내는 근원입니다. 이것으로 자기를 도장 찍듯 확정하십시오. 한 번 밝혀 드러나면 일곱 갈래로 통하고 여덟 갈래로 트입니다. 어디를 간들 스스로 얻지 못하겠습니까.
是知宿世亦曾薰炙,遇緣而彰見於行事,豈非自信耶?
이로써 알겠습니다. 지난 생에 일찍이 배어 익혀 두었기에, 인연을 만나 하는 일에 드러난 것입니다. 어찌 스스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읽기이제 그대는 밝고 재빠르기가 선배들에 못지않습니다. 평소의 학업과 재주와 역량도 세상길에서 남보다 앞섭니다. 종문에 이런 인연이 있음을 그대는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받드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겨, 도무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랜 옛적의 큰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구봉에서 만나 여러 해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다 종지를 한 번 들어 드날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곧 깊은 믿음이 일어났습니다. 이어 빛을 안으로 돌이켜 스스로를 되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니 인간 세상이 꿈같고 허깨비 같았습니다. 큰 조화를 따라 변하고 스러지니, 헛되고 덧없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하나, 천 겁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고 옮겨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모든 성현의 근본이요, 만물을 지어내는 근원입니다. 이것으로 자기를 확정하여 인가하면 됩니다. 그러면 한 번 밝게 드러나, 일곱 갈래로 통하고 여덟 갈래로 트입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스스로 얻지 못하겠습니까.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대는 지난 생에 이미 닦아 익힌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연을 만나 하는 일마다 그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스스로 믿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풀이 5
示衆 시중'迴光返照'는 『臨濟錄』 示衆의 '儞言下便自回光返照,更不別求'에 보이는 말로, 『圜悟佛果禪師語錄』에도 여러 번 나온다(병렬용례).
迴光返照 회광반조'회광반조(迴光返照)' — 임제록(臨濟錄)의 '이언하편자회광반조경불별구(爾言下便自迴光返照更不別求)' 어법을 이은 관용어로, 원오가 벽암록(碧巖錄) 및 원오어록(圜悟語錄)의 시중(示衆)에서 반복해 쓰는 표현이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原文'平時學業才力邁往於世路'→‘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 이독. 邁往을 '세상길에서 남보다 앞선다'로 옮긴 것과 '세상길을 매진해 가는 것'으로 옮긴 것이 모두 성립한다. 邁往이 '힘차게 나아감'과 '남보다 뛰어남'의 양의를 지녀,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으므로 ‘두 읽기가 다 성립함’로 유지한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原文'經年會聚'→‘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 이독. '여러 해를 함께 모임'과 '일 년이 넘도록 함께 함'이 모두 성립한다. 經年이 '해를 넘김'과 '여러 해'의 양의로 읽혀 결정적 전거가 없으므로 ‘두 읽기가 다 성립함’로 유지한다.
교감 · 顧人間世'顧人間世'의 '顧' — 저본·부록본 글자 [(厂@((既-旡)-日+口))*頁](U+2EA07, CBETA CB15164)는 顧의 이체(CBETA가 잇는 교육부 異體字字典 A04567-013 = 顧; Unihan 일본 독음 コ·かえりみる)로, 웹 글꼴에 없어 정자 '顧'로 실음(X69n1357 p0498a13). 같은 글이 실린 圜悟佛果禪師語錄(T47n1997 p0783b25)도 '迴光返照,顧人間如夢如幻'. 예전 교감의 '覩(睹)' 추정은 고친다 — 빛을 돌이켜 인간 세상을 돌아봄.
70.3
한문然能自撿點,二六時中學佛法已是雜用心,則去卻佛法乃真淨界中行李矣。
번역그러나 스스로 점검해 볼 줄 안다면, 하루 열두 때 가운데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도 이미 마음을 뒤섞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법마저 떨쳐 버려야 참으로 맑은 경계 속의 살림살이입니다.
但請依此一切不雜,卽純一洞然,無愛憎,離取捨,不分彼我,不作得失,一切法坦然,皆我家不思議處,淨妙圓明受用之物。
다만 부디 이에 기대어 온갖 것을 뒤섞지 마십시오. 그러면 곧 한결같이 환히 트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없고, 취함과 버림을 여읩니다. 나와 남을 나누지 않고, 얻음과 잃음을 짓지 않습니다. 온갖 법이 평탄하여, 모두 내 집안의 헤아릴 수 없는(不思議) 자리입니다. 맑고 묘하며 둥글고 밝아, 누려 쓰는 물건입니다.
爾須令此心長時現前,不墮沉昏,不生聰慧,入平等安閑寂靜境界。
그대는 반드시 이 마음이 오래도록 눈앞에 드러나 있게 하십시오. 어둠에 가라앉지도 말고, 총명한 지혜를 내지도 마십시오. 평등하고 편안하며 한가롭고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那有惡作業緣,識情干撓,得此本妙光明也?
어찌 악한 업의 인연이나 분별하는 생각(識情)이 끼어들어, 이 본래 묘한 광명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只恐臨境界面前,都盧忘失,依前紛亂,則不堪也。
다만 두려운 것은, 경계를 마주한 자리에서 몽땅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쉽게 읽기그러나 스스로 잘 점검해 보십시오. 하루 온종일 불법을 배우는 일조차도 이미 마음을 뒤섞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법마저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맑은 경계 속의 살림살이가 됩니다. 부디 이 자리에 기대어 온갖 것을 뒤섞지 마십시오. 그러면 곧 오롯이 환히 사무쳐 밝아집니다. 사랑도 미움도 없어집니다. 취함과 버림도 여읩니다. 나와 남을 가르지 않습니다. 얻음과 잃음도 짓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법이 탄연해집니다. 모두가 내 집안의, 헤아릴 수 없이 묘한 자리입니다. 맑고 묘하며 원만하고 밝아, 마음대로 쓰는 물건이 됩니다. 그대는 이 마음을 오래도록 눈앞에 드러나게 하십시오. 어둠에 잠기지도 말고, 총명한 지혜를 내지도 마십시오. 그렇게 평등하고 편안하며 한가롭고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 악한 업연이나 식정의 어지럽힘이 이 본래 묘한 광명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경계를 마주하는 순간 이 모두를 잊어버려, 예전처럼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 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풀이 1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原文'二六時中學佛法已是雜用心'→‘국역본의 번역을 바로잡음’. CBETA 표점이 二六時中을 學佛法에 붙이므로 '하루 열두 때 불법을 배우는 것이 이미 마음을 뒤섞어 쓰는 것'이라는 자체역이 표점에 부합한다. 二六時中을 앞의 自撿點에 붙여 '하루를 점검해보면'으로 옮긴 책은 온종일 학불법이 곧 잡용심이라는 뉘앙스가 흐려져 표점상 열세다. CBETA 표점이라는 전거로 자체역이 우세하므로 ‘국역본의 번역을 바로잡음’로 재분류한다.
70.4
한문古人修行,亦只以自所證入時中照了,截斷塵勞教活,卓卓地悠久,三二十年純熟,超出生死不爲難。
번역옛사람의 수행도 다만 스스로 증득해 들어간 자리로 때때로 비추어 밝혔습니다. 번뇌의 티끌(塵勞)을 끊어 살아나게 하고, 우뚝우뚝하게 오래 이어 갔습니다. 이삼십 년을 무르익히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著力在行處,不只空高談說之而已。古云:說得一丈,不如行得一尺。
힘쓸 곳은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헛되이 높은 말로 이야기하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옛말에 있습니다. “한 길을 말하는 것이 한 자를 행하는 것만 못하다.”
盖定慧之力,回轉業緣,正要惺惺地勇猛果決,千百生中當受用。
대개 선정과 지혜(定慧)의 힘이 업의 인연을 돌이켜 바꿉니다. 바로 또렷또렷하게, 용맹하고 결단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 생 백 생 가운데 두고두고 누려 쓰게 됩니다.
其餘古人機緣語句,不必盡要會之,但一著分明,則著著如此,千變萬化,豈移變得渠力用哉?
그 밖에 옛사람의 기연(機緣)과 말귀는 다 알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 수가 분명하면 수마다 이와 같습니다. 천 번 변하고 만 번 바뀐들, 어찌 그 힘과 작용을 옮겨 바꿀 수 있겠습니까.
內心既虗,外緣亦寂,著衣喫飯,本自天真,不勞凋琢。
안으로 마음이 이미 비고 밖으로 인연도 고요하면,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본래 절로 천진(天眞)합니다. 애써 다듬고 새길 것이 없습니다.
若或立勝見負,我能卽禍事也。切須照管,勿作此態。
만약 이김을 세우고 짐을 보아 내가 능하다 한다면, 그것이 곧 화가 되는 일입니다. 부디 잘 살펴 단속하여 이런 태도를 짓지 마십시오.
由是可入無我真實,平等如如,不動不變,淨妙清涼穩密田地矣。
이로 말미암아 나 없는 진실(無我眞實)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평등하고 한결같아(如如)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맑고 묘하며 서늘하고 편안하며 빈틈없는 자리입니다.
지공(誌公)이 말했습니다.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양 없는 광명 속에서 늘 자재하다.”
쉽게 읽기옛사람의 수행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스스로 증득해 들어간 자리를 때때로 비추어 밝혔습니다. 그렇게 티끌 같은 번뇌를 끊어 내되, 우뚝하게 오래 이어 갔습니다. 그렇게 이삼십 년을 무르익도록 익혔습니다. 그러면 나고 죽음을 뛰어넘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힘써야 할 곳은 실제로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헛되이 높은 말만 늘어놓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길을 말함이 한 자를 행함만 못하다.” 대개 정혜의 힘으로 업연을 돌이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렷또렷하게 용맹하고 과단성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 생 백 생에 걸쳐 두고두고 쓰게 됩니다. 그 밖에 옛사람의 기연과 어구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곳이 분명하면 곳곳이 다 이와 같습니다. 천 가지로 변하고 만 가지로 바뀌어도, 어찌 그 힘의 작용을 옮겨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마음이 비고 밖으로 인연이 고요해집니다. 그러면 옷 입고 밥 먹는 일이 본래 절로 천진합니다. 애써 다듬고 꾸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김을 세우고 짐을 따져 내가 잘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곧 화가 됩니다. 부디 잘 살피고 단속하여 이런 마음을 짓지 마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나 없는 참됨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평등하고 여여하며,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맑고 묘하며 서늘하고 편안하며 은밀한 경지에 이릅니다. 지공 스님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양 없는 광명 가운데 늘 자재하다.”
풀이 3
不起纖毫修學心無相光中常自在 불기섬호수학심무상광중상자재'不起纖毫修學心,無相光中常自在'는 寶誌 「十二時頌」 人定亥의 구절이다(『景德傳燈錄』 권29, T51n2076_p0450b20; 『聯燈會要』 권30, X79n1557_p0260c19). 圜悟는 『碧巖錄』(T48n2003_p0222c19)과 語錄(T47n1997_p0719b27·p0762a02)에서도 이 두 구를 든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原文'若或立勝見負,我能卽禍事也'→‘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 이독. '이김을 세우고 짐을 보아 내가 능하다 한다면'과 '훌륭하다는 견해를 세우고 자신의 능력을 자부한다면'이 모두 승부심·아만심을 화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양립 의역이다. 압축 구문의 파자가 갈릴 뿐 어느 한쪽을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으므로 ‘두 읽기가 다 성립함’로 유지한다.

下권 차례 (72편)

이 편의 낱말 36
  1. 乃佛乃祖直指此大法 내불내조직지차대법

    '부처와 조사가 곧바로 이 큰 법을 가리킴(直指)'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선종 종지를 편 첫머리 표어이다.

  2. 大威德光明 대위덕광명

    크나큰 위엄과 덕(威德)의 광명이다. 중생마다 본래 갖춘 자성(自性)의 밝음을 천 개의 해(千日並出)에 견준 비유이다.

  3. 螢火之光豈比太陽 형화지광기비태양

    반딧불(螢火)의 빛을 태양에 견줄 수 없다는 비유이다. 세간의 알음알이(知見)가 자성 광명에 비하면 하찮음을 대비한 것이다.

  4. 投誠放下 투성방하

    정성을 다해(投誠) 온갖 헤아림을 내려놓음(放下)이다.

  5. 就宗師決擇 취종사결택

    눈 밝은 종사(宗師)에게 나아가 사정(邪正)을 가려 판단(決擇)받아 인가를 구함이다.

  6. 剗去浮塵知見 잔거부진지견

    잔(剗)(剷)은 깎아냄이다. 뜬 티끌 같은 알음알이(浮塵知見)를 깎아 없앰이다.

  7. 大徹大悟 대철대오

    크게 사무쳐(徹) 크게 깨달음(悟)이다. 선문에서 철저한 오도(悟道)를 이르는 상용어이다.

  8. 老禪碩德 노선석덕

    노련한 선사(老禪)와 큰 덕을 갖춘 이(碩德)이다. 이미 깨달아 실천하는 선지식들이다.

  9. 臨合殺結角頭自解撒手 임합살결각두자해살수

    합살(合殺)은 악곡을 맺는 마지막 매듭에서 온 말로 '최후의 결착'이다. 결각두(結角頭)는 매듭진 모서리, 곧 마지막 관문이다. 살수(撒手)는 손을 놓음이다. 마지막 고비에서 스스로 매듭을 풀고 손을 놓아버림을 이른다.

  10. 迴光返照 회광반조

    밖으로 치닫던 빛(의식)을 돌이켜 자기 본원(本源)을 되비춤이다. 임제록(臨濟錄)의 '회광반조(迴光返照)' 어법을 이은 것이다.

  11. 千劫不壞不移易一切聖賢根本 천겁불괴불이역일체성현근본

    천 겁이 지나도 무너지거나 옮겨 바뀌지 않는, 모든 성현의 근본이자 만물을 지어내는 근원(造物之淵源)이다. 곧 불변의 자성·본지(本地)를 가리킨다.

  12. 印定自己 인정자기

    스스로를 인가(印可)하여 확정함이다. 다른 데서 구하지 않고 자기 본분을 스스로 증험함이다.

  13. 七通八達 칠통팔달

    일곱 갈래로 통하고 여덟 갈래로 트인다는 말이다. 어디로 가나 막힘없이 훤히 통함을 이르며, 깨친 이의 걸림 없는 자재함을 그린다.

  14. 薰炙 훈자

    향내가 배고 불기운이 스미듯, 오래 가까이 지내며 감화를 받아 몸에 밴다는 말이다. 스승 곁에서 오래 가르침을 받는 일이나, 지난 생부터 닦아 익혀 온 힘을 이른다.

  15. 純一洞然 순일동연

    순일(純一)하게 뒤섞임 없이 환히 사무쳐 밝음이다.

  16. 說得一丈不如行得一尺 설득일장불여행득일척

    '한 길(丈)을 말함이 한 자(尺)를 행함만 못하다'는 선문 속담이다. 담론보다 실천을 앞세우라는 뜻이다.

  17. 定慧之力回轉業緣 정혜지력회전업연

    선정(定)과 지혜(慧)의 힘으로 업연(業緣)을 돌이켜 바꿈이다.

  18. 惺惺地勇猛果決 성성지용맹과결

    성성(惺惺)은 또렷또렷 깨어 있음이다. 성성한 상태에서 용맹하고 과단성 있게 함이다.

  19. 著衣喫飯本自天真 저의끽반본자천진

    옷 입고 밥 먹는 일상 그대로가 본래 천진(天眞)함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취지로, 애써 꾸며 다듬을(雕琢) 것이 없다.

  20. 立勝見負我能卽禍事 입승견부아능즉화사

    이김(勝)을 세우고 짐(負)을 보아 '내가 능하다(我能)' 하는 승부·아만(我慢)의 마음이 곧 화(禍)가 됨이다.

  21. 無我真實平等如如 무아진실평등여여

    나 없음(無我)의 참됨에 들어 평등하고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경지이다.

  22. 不起纖毫修學心無相光中常自在 불기섬호수학심무상광중상자재

    보지(寶誌, 지공) 화상의 「십이시송」 가운데 밤 열 시 무렵(인정해)을 읊은 구절이다. 닦고 배우려는 마음을 털끝만큼도 일으키지 않으니, 모양 없는 광명 가운데 늘 자재하다는 뜻이다. 닦음도 깨침도 따로 세우지 않는 경지를 말할 때 선문에서 즐겨 든다.

  23. 二六時中 이육시중

    하루 열두 때 내내, 곧 온종일·언제나를 이른다. 옛날에는 하루를 열두 때로 나누었고, 이육(二六)은 2×6=12를 말한다. 선어록에서 일상의 모든 순간을 가리킬 때 늘 쓴다.

  24. 塵勞 진로

    번뇌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티끌처럼 마음을 더럽히고 지치게 한다 하여 진로라 한다. 『유마경』은 이 진로가 곧 부처가 될 씨앗이라고도 하였다.

  25. 示衆 시중

    스승이 대중 앞에서 법을 일러 보이는 일, 또는 그 말을 이른다. 선종 어록에서는 법당에 올라 하는 상당(上堂), 저녁에 하는 소참(小參)과 함께 설법의 한 갈래로 묶인다.

  26. 裴休 배휴

    배휴(裴休, 797~870)이다.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공미(公美)이다. 황벽(黃檗)을 스승으로 모셔 그 가르침을 『전심법요』로 엮었다. 선문에서는 재가 수행자의 본보기로 꼽힌다.

  27. 楊大年 양대년

    송나라 문신 양억(楊億, 974~1020)이며, 대년(大年)은 그의 자이다. 한림학사로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다듬고 서문을 썼다. 광혜원련에게 참구하여 그 법을 이은 재가 제자로 꼽힌다.

  28. 韓朝議 한조의

    원오가 법어 「시한조의」를 지어 준 재가 거사로, 그 글이 원오심요와 원오어록 권15에 실려 있다. '조의'는 송나라 문관의 품계인 조의대부를 줄인 말이니, 그 품계를 지닌 한씨 관료이다. 원오에게 진영 찬을 청한 일도 원오어록 권20에 보인다.

  29. 等𢑱 등이

    동배(同輩)·또래, 동렬(同列)의 무리이다. 𢑱는 이(夷)의 이체자이다. '출호등이(出乎等夷)'는 무리보다 빼어나 뛰어남을 이른다.

  30. 頴脫 영탈

    주머니 속 송곳 끝이 삐져나오듯(囊中之錐) 재능이 남달리 빼어남이다. 모수자천(毛遂自薦) 고사에서 온 말이다.

  31. 歐峰 구봉

    지명(산봉우리 이름)이다. 원오와 한조의(韓朝議)가 여러 해 함께 모여 지낸 곳이다. 원오 행적과 관련된 강서·호남 일대의 봉우리로 보이나 정확한 소재는 미상이다.

  32. 行李 행리

    본래 여장(旅裝)·행장이다. 선문에서는 '살림살이', 곧 수행자의 본분 활동을 뜻한다. '진정계중행리(眞淨界中行李)'는 참으로 청정한 경계 속의 살림살이이다.

  33. 誌公 지공

    보지(寶誌, 418~515) 화상이다. 남조 송·제·양나라에 걸쳐 산 신이한 승려로, 일정한 거처 없이 다니며 예언 같은 노래를 지었다. 양 무제(梁武帝)가 깊이 받들었고, 「대승찬(大乘讚)」·「십이시송(十二時頌)」을 남겼다.

  34. 等夷 등이

    동배(同輩)·또래, 동렬(同列)의 무리이다. 𢑱는 夷의 이체자이다. '出乎等夷'는 무리보다 빼어나 뛰어남을 이른다.

  35. 誌公·寶誌·無修無證 지공·보지·무수무증

    梁의 寶誌和尚. 그의 「大乘讚」·「十二時頌」이 『景德傳燈錄』 권29에 실렸다. 「十二時頌」 人定亥의 '不起纖毫修學心,無相光中常自在'(T51n2076_p0450b20)는 닦음도 깨침도 따로 세우지 않는 無修無證의 뜻으로 禪門에서 즐겨 인용되며, 圜悟도 『碧巖錄』·語錄에서 거듭 들었다(T48n2003_p0222c19; T47n1997_p0719b28 등).

  36. 裴休·裴相國 배휴·배상국

    唐의 재상 裴休(字 公美). 黃檗希運에게 參問하여 그 법어를 『傳心法要』로 엮고 序를 지었다(T48n2012A_p0379b25 '河東裴休集并序'). 『景德傳燈錄』 권12에 그의 章이 있고(T51n2076_p0293a28), 권9에 「裴休相國傳心偈」가 실렸다(T51n2076_p0273a09).

문단 4국역본 대조 5교감 1 · 깊이 읽기에서 봄낱말 36저본 《卍新纂續藏經》

저본

卍新纂續藏經 佛果克勤禪師心要(CBETA 전자판). 국역본 대조는 선림고경총서 국역본과 견준 것으로, 대조에 필요한 구절만 출처를 밝혀 인용합니다.

원문은 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전자판을 따르며 CC BY-NC-SA 3.0 TW(비영리 · 같은 조건)로 싣습니다. 정자 · 표점을 일부 손질했고 고친 곳은 교감에 남겼습니다 — 저작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