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초감

역주 · 원오심요 · 上권 19편

온초감사(蘊初監寺)에게 주는 글

示蘊初監寺 住蘇州明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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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한문只道與你說一句子,早是著惡水潑人,何況更瞬目揚眉、敲床豎拂?
번역그저 그대에게 한마디 일러 준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벌써 더러운 물을 남에게 끼얹는 짓이다. 하물며 다시 눈을 깜빡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선상을 두드리고 불자(拂子)를 세우는 일이야 어떻겠는가.
是什麼下喝行棒軒?知是平地上骨堆。
이것이 다 무엇인가. 할(喝)을 내지르고 방(棒)을 휘두르는 것도, 분명히 알고 보면 평지 위에 뼈 무더기를 쌓은 꼴이다.
更有不識好惡底,問佛問法、問禪問道,請相爲、乞相接,求向上向下佛法知見、語句道理,
게다가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부처를 묻고 법을 묻고, 선을 묻고 도를 묻는다. 이끌어 달라 청하고, 맞아 달라 애걸한다. 향상(向上)이니 향하(向下)니 하는 불법의 지견(知見)과 어구와 도리를 구한다.
是乃泥裏洗土、土裏洗泥,幾時得脫灑去?
이는 진흙 속에서 흙을 씻고 흙 속에서 진흙을 씻는 짓이다. 언제 말끔히 벗어나겠는가?
有般底聞與麼道,便作計較云:我會也。佛法本來無事,人人無不具足,終日喫飯著衣,何曾欠少來?便向無事平常界裏打住,
어떤 부류는 이런 말을 듣고 곧 이리저리 헤아려 말한다. “나는 알았다. 불법은 본래 일이 없다(本來無事). 사람마다 다 갖추고 있다. 종일 밥 먹고 옷 입으니, 언제 무엇이 모자란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는 곧 일 없고 평상(平常)한 경계 속에 눌러앉아 버린다.
殊不知豈有恁麼事來?故知須是本分其中人,方諳從上宗乘本分。
그들은 전혀 모른다. 그처럼 손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본분(本分) 속의 사람이라야 비로소 예로부터 내려온 종승(宗乘)의 본분을 안다.
若實有悟入處,識起倒、知進退,別休咎、離滲漏,日近日親,轉更豹變,不守窟宅,跳出圈圚,不疑天下老漢舌頭,一似生鐵鑄就,
만약 참으로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으면, 일어남과 넘어짐을 알고 나아감과 물러남을 안다. 잘잘못(休咎)을 가리고, 새어 나가는 허물(滲漏)을 떠난다. 날로 가까워지고 날로 친해져, 표범이 무늬를 바꾸듯(豹變) 더욱 달라진다. 제 굴에 머물지 않고 울타리를 뛰쳐나와, 천하 노장(老漢)들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쇠를 부어 만든 것과 같다(生鐵鑄就).
正好著力修行供養,然後可以然無盡燈、行無間道,舍身舍命撈摝羣生,令他各出樊籠去執縛,
바로 이때가 힘써 수행하고 공양하기에 좋다. 그런 뒤라야 다함 없는 등불(無盡燈)을 밝히고, 사이 없는 도(無間道)를 행할 수 있다. 몸과 목숨을 내던져 뭇 중생을 건져 올려, 저마다 새장을 벗어나 얽매임에서 풀려나게 할 수 있다.
佛病祖病俱瘥,解脫深坑已出,作箇無爲無事快活道人去。
부처라는 병과 조사라는 병(佛病祖病)이 모두 낫고,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解脫深坑)에서도 이미 나와, 함이 없고 일 없는(無爲無事) 쾌활한 도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然自既得度,須不廢行願,思度一切,忍苦捍勞,向薩婆若海爲舟爲航,始有少分相應,
그러나 스스로 이미 건넜더라도, 행원(行願)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모두를 건지기를 생각하고, 괴로움을 참고 수고를 무릅써야 한다. 온갖 것을 아는 지혜(薩婆若)의 바다에서 배가 되고 뗏목이 되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맞아든다.
慎勿做骨羸錐、露柱燈籠,打淨潔毬子自了得,濟甚事?
부디 뼈만 남은 송곳(骨羸錐)이나 드러난 기둥(露柱)·등롱(燈籠)이 되어, 깨끗한 공(毬子)이나 굴리며 혼자 끝내 버리지 마라. 그래서야 무슨 일을 이루겠는가?
是故古德須勉人行箇一條路,堪報不報之恩。
그러므로 옛 큰스님들은 굳이 사람들에게 이 한 가닥 길을 가라고 권하셨다. 그래야 갚을 길 없는 은혜(不報之恩)를 갚을 만하다.
如今諸方多有靈利衲子,要直透得徹,
요즘 여러 곳에 영리한 납자(衲子)가 많아, 곧바로 사무쳐 꿰뚫으려 한다.
有底探頭太過、要易會,纔知些趣向便欲出頭,又是一等蹉過。
그런데 어떤 이는 지나치게 앞질러 엿보며(探頭太過) 쉽게 알려고만 한다. 나아갈 데(趣向)를 조금 알자마자 곧 세상에 나서려(出頭) 한다. 이것도 한 가지로 어긋나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有推而不出亦未圓通,知時節因緣而不失機會,乃通方之士也。
어떤 이는 미루기만 하고 나서지 않으니, 이 역시 아직 두루 통하지(圓通) 못한 것이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알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곧 사방에 두루 통하는 사람(通方之士)이다.
쉽게 읽기그저 그대에게 한마디 일러 주겠다는 그 말부터가 벌써 잘못이다. 남에게 더러운 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하물며 눈을 깜빡이고 눈썹을 치켜뜨는 짓이야 어떻겠는가. 참선 자리를 두드리고 먼지떨이 같은 불자를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다 무엇이겠는가. 고함을 치는 할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방 또한, 훤히 꿰뚫어 보면 그저 평평한 땅에 뼈만 잔뜩 쌓아 놓은 꼴이다. 게다가 좋고 나쁨조차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부처를 묻고 법을 묻고, 선을 묻고 도를 묻는다. 서로 이끌어 달라 조르고, 맞아 달라 애걸한다. 위로 오르는 길이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니 하며, 불법의 알음알이와 그럴듯한 말과 이치를 구한다. 이것은 진흙 속에서 흙을 씻고 흙 속에서 진흙을 씻는 짓이다. 이래서야 언제 말끔히 벗어나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곧 제 나름대로 따진다. “나는 이제 알았다. 본래 아무 일도 없고, 사람마다 다 갖추고 있다. 날마다 밥 먹고 옷 입으니, 언제 무엇 하나 모자란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는 일 없고 평범하다는 자리에 눌러앉아 버린다. 하지만 이는 크게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손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알아야 한다. 오직 제 본분을 갖춘 사람이라야, 예로부터 내려온 이 가르침의 본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깨달아 들어간 자리가 있는 사람은 다르다. 그는 일어남과 넘어짐을 알고, 나아감과 물러남을 안다. 잘잘못을 가리고, 마음이 새어 나가는 허물을 떨쳐 버린다. 날이 갈수록 진리에 가까워지고 더 친해진다. 표범이 철 따라 무늬를 바꾸듯 나날이 새로워진다. 낡은 소굴에 머물지 않고, 갇힌 울타리를 뛰쳐나온다. 천하 노스님들의 말씀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무쇠를 부어 만든 듯 굳건하다. 바로 이때가 온 힘을 다해 수행하고 공양하기에 딱 좋은 때다. 그런 뒤라야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히고, 끊임없는 도를 걸을 수 있다. 몸과 목숨을 내던져 뭇 중생을 건져 올려, 저마다 새장을 벗어나 얽매임에서 풀려나게 할 수 있다. 그리하면 부처라는 병도 조사라는 병도 다 낫는다.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마저 이미 벗어나, 아무것도 함이 없고 일도 없는 편안한 도인이 되어 간다. 그러나 스스로 이미 벗어났더라도, 중생을 건지려는 큰 서원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모든 이를 건지려 마음먹고, 괴로움을 참고 수고를 무릅써야 한다. 온갖 지혜의 바다에서 배가 되고 뗏목이 되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도와 들어맞는다. 부디 마른 뼈다귀나 뾰족한 송곳처럼 앙상해지지 마라. 우두커니 선 기둥이나 등롱처럼 되어, 깨끗한 공이나 굴리며 저 혼자 끝내 버리지도 마라. 그래서야 무슨 일을 이루겠는가. 그러기에 옛 큰스님들은 굳이 사람들에게 이 한 가닥 길을 걸으라 권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갚을 길 없는 은혜를 갚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러 곳에 영리한 수행승이 많다. 다들 곧바로 사무쳐 꿰뚫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무 앞질러 넘겨다보며 쉽게만 알려 한다. 그러다 겨우 갈 길을 알아채자마자 곧 세상에 나서려 한다. 이 또한 한 가지로 어긋나 버리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미루기만 하고 좀처럼 나서지 못한다. 이 역시 아직 두루 통하지 못한 것이다. 때와 인연을 알아채고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사방에 두루 통하는 사람이다.
풀이 10
露柱燈籠 노주등롱'慎勿做骨羸錐、露柱燈籠,打淨潔毬子自了得'은 앞의 '須不廢行願,思度一切'와 맞서, 自度에 머물러 行願을 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生鐵鑄就 생철주취'不疑天下老漢舌頭,一似生鐵鑄就'의 무쇠 같다는 말은 노스님들의 혀가 아니라 의심이 끊긴 깨친 이 자신을 형용한 것으로 읽는다(上/29 '…然後乃生鐵鑄就。喚作透出荊棘林,不疑天下老漢舌頭'와 같은 짜임; 이 역주의 판단).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원문 '殊不知豈有恁麼事來'. ‘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한 이독이다. 豈…來를 반어·감탄으로 읽으면 '그처럼 손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없다)가 되어 자체역이 성립하고, 恁麼事를 뒤의 宗乘本分이 가리키는 실사(實事)로 보면 '이러한 일이 있는 줄 (모른다)'가 되어 책의 독법이 성립한다. 宋代 구어 종결사 來와 반어 豈의 무게로는 부정 독법이 더 관용적이나, 후속 '須是本分其中人方諳'과의 연결은 책 독법을 뒷받침한다. 어느 한쪽을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어 병존으로 둔다.
국역본 대조 · 국역본을 바로잡음別休咎
책 오역. 休咎는 길흉·선악을 뜻하는 짝 명사이고 別은 분별하다이다. 識起倒·知進退·別休咎·離滲漏의 대구 구조상 '좋고 나쁨을 가리다'가 옳다. 책의 '허물 쉴 줄을'은 休를 '쉬다', 咎를 '허물'로 끊어 대구를 깨뜨렸다. 내 번역 '잘잘못을 분별하고'가 옳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원문 '一似生鐵鑄就'. ‘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한 이독이며 자체역이 우세하다. '不疑天下老漢舌頭一似生鐵鑄就'로 이어 읽어 노장(老漢)의 혓바닥이 무쇠를 부어 굳힌 듯 확고함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禪家의 상투로 보면 자체역이 자연스럽다. 책은 여기서 끊어 뒤의 수행에 붙이고 鑄就를 '단련하듯'으로 옮겼으나, 鑄就는 주조하여 완성·응결됨을 뜻하므로 '단련하듯'(단련 과정)으로 봄은 부정확하다. 다만 CBETA 구두가 미확정이어서 결정적 전거로 단정하지 않고 병존으로 둔다.
국역본 대조 · 두 읽기 다 성립원문 '推而不出'. ‘두 읽기가 다 성립함’ 양립가능한 이독이다. 推를 남이 밀어줌·추천의 피동으로 보면 책의 '추천해도 나오지 않으려'가 되어 앞의 便欲出頭와 대조가 선명하고, 推를 미루다·머뭇거림(推託)으로 보면 자체역의 '미루기만 하고 나서지 못함'이 된다. 대구상 책이 약간 우세하나 무표지 推를 능동(推託)으로 봄도 자연스럽고, 책이 덧붙인 '잘못된 무리들'은 원문에 없는 과의역이다. 우열을 확정할 결정적 전거가 없어 병존으로 둔다.
교감 · 軒知是平地上骨堆'軒知是平地上骨堆' — 저본(X69n1357 p0460c03)은 '下喝行棒軒?知是…'로 '軒'을 앞 구에 붙였으나, '軒知'(분명히 알고 보면)로 이어 읽는다(上13 교감).
교감 · 然無盡燈'然無盡燈'의 '然'은 '燃'(불을 붙이다)과 같은 글자로 쓰였다.

上권 차례 (68편)

이 편의 낱말 29
  1. 惡水潑人 악수발인

    '더러운 물을 사람에게 끼얹다'는 뜻이다. 한 마디 설법조차 이미 학인을 더럽힌다는 선가(禪家) 상투어이다(설일구자(說一句子)=저악수발인(著惡水潑人)).

  2. 瞬目揚眉 순목양미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치켜올린다는 말이다. 선승이 말 대신 몸짓으로 뜻을 보이던 방편을 이른다. 마조(馬祖)가 약산(藥山)에게 '어떤 때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게 한다'고 한 문답으로 널리 알려졌다.

  3. 拂子 불자

    총채 모양 법구이다. 선사가 설법·거량 시 들어 종지를 나타낸다.

  4. 平地上骨堆 평지상골퇴

    '평지에 쌓인 뼈무더기'이다. 봉할(棒喝)·양미(揚眉) 같은 방편조차 결국 죽은 형해일 뿐이라는 폄칭이다.

  5. 泥裏洗土·土裏洗泥 이리세토·토리세니

    '진흙 속에서 흙 씻고 흙 속에서 진흙 씻음'이다. 번뇌에 번뇌를 더하는 무익·중복의 헛수고 비유이다.

  6. 無事平常界裏打住 무사평상계리타주

    '본래무사(本來無事)'를 오해해 무사(無事)·평상(平常)에 안주하는 병통이다. 원오가 경계하는 완공적(頑空的) 안주이다.

  7. 識起倒·知進退 식기도·지진퇴

    일어남과 넘어짐(기도, 起倒)을 알고, 나아감과 물러남(진퇴, 進退)을 앎이다.

  8. 別休咎·離滲漏 별휴구·이삼루

    길흉과 잘잘못(휴구, 休咎)을 가리고, 마음이 새어 나가는 허물(삼루, 滲漏)을 여읨이다. 삼루(滲漏)는 동산(洞山)의 삼삼루(三滲漏)에서 온 말이다.

  9. 不守窟宅·跳出圈圚 불수굴택·도출권궤

    소굴에 안주하지 않고 올가미를 벗어남이다. 권회(圈圚)(=권회(圈繢)/권궤(圈櫃))는 얽어매는 그물·우리이다.

  10. 生鐵鑄就 생철주취

    무쇠를 녹여 부어 만든 것 같다는 뜻이다. 깨친 이가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모습을 빗대는 말이다.

  11. 撈摝羣生 노록군생

    '중생을 건져 올림'이다. 노녹(撈摝)은 물에서 건지는 동작으로 제도 비유이다.

  12. 解脫深坑 해탈심갱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라는 말이다. 해탈이나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안주하면 그것이 도리어 빠져나오기 어려운 함정이 된다고 경계하는 말이다.

  13. 忍苦捍勞 인고한로

    고통을 참고 수고를 무릅씀이다. 자기득도(自既得度) 뒤에도 행원(行願)을 폐하지 않는 보살의 하화행(下化行)이다.

  14. 骨羸錐 골리추

    노주(露柱)·등롱(燈籠)·정결구자(淨潔毬子)와 나란히 놓인 무정(無情)·무용(無用)의 형상이다. 뾰족한 송곳류로 추정하나 뜻은 미상이다.

  15. 淨潔毬子 정결구자

    '티끌 없는 매끈한 공'이다. 잡을 데 없이 말끔하기만 한 공견(空見)·자기만족적 완공(頑空) 비유이다.

  16. 無間道 무간도

    본래 교학에서 번뇌를 끊는 바로 그 순간의 수행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앞뒤 사이에 틈이 없다 하여 무간이라 한다. 선문에서는 한순간도 끊어짐 없이 곧장 이어 가는 공부의 길을 뜻한다.

  17. 佛病祖病 불병조병

    부처라는 병과 조사라는 병이다. 부처나 조사를 높이 받들어 그 말과 자취에 매이는 것도 병이 된다는 뜻이다. 부처·조사라는 생각마저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롭다.

  18. 無盡燈 무진등

    다함이 없는 등불이다. 『유마경』에서 한 등불이 백천 등불에 불을 옮겨도 빛이 줄지 않듯, 한 사람이 많은 이를 깨우쳐도 법이 다함없이 이어짐을 비유했다.

  19. 露柱燈籠 노주등롱

    법당 앞의 드러난 기둥(노주)과 등불 거는 기구(등롱)다. 생각도 감정도 없는 무정물의 대표로, 선사들이 문답에 자주 끌어 썼다.

  20. 蘊初監寺 온초감사

    원오가 원오심요의 「시온초감사」를 지어 준 승려 온초이다. 감사는 절의 살림과 재정을 맡아보는 소임이다. 제목 아래에 '소주 명인사에 머묾'이라는 작은 주가 붙어 있다.

  21. 敲床豎拂 고상수불

    '선상(禪床)을 두드리고 불자(拂子)를 세움'이다. 스승의 시범적 기용(機用)이다.

  22. 下喝行棒 하할행방

    '할(喝)을 내리고 봉(棒)을 휘두름'이다. 임제할(臨濟喝)·덕산봉(德山棒)으로 대표되는 봉할(棒喝) 접화이다.

  23. 豹變 표변

    표범이 털갈이를 하여 무늬가 새롭게 빛나듯 확 달라짐을 이른다. 주역 혁괘의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에서 온 말로, 선가에서는 공부하는 이가 크게 탈바꿈하는 데 빗댄다.

  24. 樊籠 번롱

    새장·우리이다. 생사(生死)·번뇌의 속박이다. 영타각출번롱(令他各出樊籠)은 중생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함이다.

  25. 薩婆若海 살파약해

    살파약(薩婆若)(sarvajna,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이다. 일체지해(一切智海)에서 주항(舟航)이 되어 중생을 실어 건넨다.

  26. 堪報不報之恩 감보불보지은

    갚을 수 없는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음이다. 고덕(古德)이 사람에게 일조로(一條路)(수행·전법의 길)를 권한 뜻이다.

  27. 通方之士 통방지사

    사방에 통달한 대방(大方) 종사이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알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원숙한 인물이다.

  28. 從上宗乘本分 종상종승본분

    위로부터 이어온 종문(宗門)의 본분사이다. 원오의 사(師) 오조법연(五祖法演)·사공(師公) 백운수단(白雲守端)으로 이어지는 양기파(楊岐派) 임제종풍(臨濟宗風)을 가리킨다.

  29. 骨律錐 골률추

    뼈만 남은 송곳이라는 말이다(골률(骨律)=골돌(骨突)). 꾸밈없이 본분만 지키는 납자를 비유한다.

문단 1국역본 대조 4교감 2 · 깊이 읽기에서 봄낱말 29저본 《卍新纂續藏經》

저본

卍新纂續藏經 佛果克勤禪師心要(CBETA 전자판). 국역본 대조는 선림고경총서 국역본과 견준 것으로, 대조에 필요한 구절만 출처를 밝혀 인용합니다.

원문은 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전자판을 따르며 CC BY-NC-SA 3.0 TW(비영리 · 같은 조건)로 싣습니다. 정자 · 표점을 일부 손질했고 고친 곳은 교감에 남겼습니다 — 저작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