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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원오심요 · 앞머리

원오극근 선사 행장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은 북송 말에서 남송 초에 걸쳐 살았던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선승이다. 팽주(彭州) 숭녕현(崇寧縣), 곧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부근 사람으로, 속성은 락(駱)씨, 자(字)는 무착(無著), 법명은 극근(克勤)이다. 북송 휘종은 그에게 '불과(佛果)'라는 호를 내렸고, 남송 고종은 '원오(圜悟)'라는 호를, 뒤에 다시 '진각(眞覺)'이라는 호를 내렸다. 그래서 흔히 불과 원오 극근, 또는 원오 극근이라 부른다.

대대로 유학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하루에 천 글자를 외울 만큼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유가의 글을 익혔다고 전한다. 그러다 어느 날 절에 갔다가 불경을 보고 마치 옛적에 지녔던 물건을 다시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아, 열대여섯 살 무렵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문조(文照)와 민행(敏行) 같은 강사에게 나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비롯한 경론을 배웠다. 그러나 한 차례 큰 병을 앓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문자와 알음알이만으로는 생사의 큰일을 마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선문(禪門)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후 여러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였다. 옥천 승호(玉泉承皓), 대위 모철(大潙慕喆), 황룡 조심(黃龍祖心), 동림 상총(東林常總) 등을 차례로 찾아 법을 물으니, 이들이 모두 그를 '법의 큰 그릇'이라 인정하였다. 마침내 기주(蘄州) 오조산(五祖山)의 법연(法演) 선사에게 나아갔다. 오조 법연은 임제종 양기파의 종장(宗匠)으로 꼽히는 이였다.

그가 오조 법연에게서 크게 깨친 기연은 선문에 자세히 전한다. 처음 법연의 회상에 이르렀을 때, 극근은 자기 견해를 내세우다 스승과 뜻이 맞지 않아 화를 내고 자리를 떠나려 하였다. 법연은 그를 붙잡지 않고 다만 이렇게 일렀다. "그대가 뒷날 한 번 크게 앓아 죽을 고비에 이르거든, 그제야 비로소 나를 생각하게 되리라." 과연 극근은 길을 가던 중 금산(金山)에 이르러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평소 지녔던 어떤 방편도 아무 힘이 되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법연의 말이 떠올라, 병이 낫는 대로 오조산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였다. 병을 털고 돌아오자 법연은 웃으며 그를 맞아 다시 곁에 두고 시자로 삼았다.

얼마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진제형(陳提刑)이 법연을 찾아와 도를 물었다. 법연이 말하였다. "제형은 젊은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 보셨소? 그 시의 두 구절이 자못 우리 종문(宗門)의 소식과 가깝소 —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본디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그 목소리를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郎認得聲).」" 제형은 "예, 예" 하고 응하였다. 법연은 "자세히 살피시오" 하였다.

마침 곁에서 스승을 모시고 있던 극근이 물었다. "화상께서 소염시를 드셨는데, 제형이 알아들었습니까?" 법연이 말하였다. "그는 다만 그 소리를 알았을 뿐이다(他祗認得聲)." 극근이 되물었다. "「다만 낭군이 그 목소리를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라 하셨으니, 그가 이미 소리를 알았거늘 어째서 도리어 옳지 않습니까(他既認得聲, 為甚卻不是)?" 법연이 대뜸 말하였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祖師西來意, 庭前柏樹子). 자(聻)!" 그 말끝에 극근은 홀연 깨친 바가 있었다(有省).

극근이 방을 나서는데, 마침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날개를 치며 크게 우는 것을 보고, 문득 "이것이 바로 그 소리가 아닌가!" 하며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大悟). 그는 깨달은 경지를 게송으로 지어 법연에게 아뢰었고, 법연은 대중에게 "내 시자가 선(禪)을 얻었다(我侍者參得禪也)" 하며 그의 깨달음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극근은 임제의 정맥(正脈)을 이었으며, 법연 문하의 뛰어난 세 제자 — 불과 극근(佛果克勤)·불안 청원(佛眼清遠)·불감 혜근(佛鑑慧懃), 이른바 '삼불(三佛)' —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숭녕(崇寧) 원년인 1102년, 마흔 살에 어머니의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성도의 소각사(昭覺寺) 주지가 되었다. 그 뒤 협산(夾山)의 영천원(靈泉院)에 머물렀는데, 바로 그곳 벽암(碧巖) 방장(方丈)에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의 「송고 백칙(頌古百則)」을 하나하나 들어 수시(垂示)·착어(著語)·평창(評唱)하였다(대략 1111~1117년의 일이다). 문인들이 이 강의를 받아 적어 엮은 것이 곧 『벽암록(碧巖錄)』이며, 1128년에 간행되어 '종문 제일의 책'이라 일컬어졌다. 다만 뒷날 그의 제자 대혜 종고(大慧宗杲)는 학인들이 도리어 그 문자에 매달리는 폐단을 우려하여 판목을 거두어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설두의 「염고(拈古)」를 들어 『격절록(擊節錄)』을 남겼다.

그 밖에도 담주(潭州) 도림사(道林寺), 강녕(江寧)의 장산(蔣山)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 진강(鎭江) 금산(金山)의 용유사(龍游寺) 같은 강남의 큰 절에 잇따라 주석하면서 이름이 크게 드러났다. 1124년, 예순두 살에는 북송의 도읍 변경(汴京)의 천령 만수사(天寧萬壽寺)에 주석하였다. 그가 '불과선사(佛果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은 것은, 무진거사(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의 천거로 휘종이 내린 것이라 전한다.

1127년 정강(靖康)의 변으로 북송이 무너지고 정치의 중심이 강남으로 옮겨가자, 그도 남쪽으로 내려갔다. 고종은 그를 크게 예우하며 '원오(圜悟)'라는 호를 내렸다. 이 무렵 그는 여산(廬山) 운거산(雲居山)의 진여원(眞如院) 등에서 법을 폈다. 그리고 1130년 무렵 다시 고향 성도의 소각사로 돌아갔다. 소흥(紹興) 5년(1135년) 8월 5일, 가벼운 병을 보이다가 임종게를 남기고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 세수는 일흔셋이었다. 조정에서 진각선사(眞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소각사에 탑을 세워 적조(寂照)라 이름하였다.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앞서 말한 『벽암록』이며, 그 짝이 되는 『격절록』이 있다. 이 책 「심요(心要)」는 그가 평생 여러 사람에게 준 편지를 문인 자문(子文)이 모아 엮은 서간집이고, 그 밖에 제자들이 엮은 『원오불과선사어록(圜悟佛果禪師語錄)』이 전한다.

그의 문하에서는 백여 명의 법제자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오직 무자(無字) 화두 하나로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크게 이룬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와, 뒷날 그 법손이 크게 번성하여 일본 임제종으로까지 이어진 호구 소륭(虎丘紹隆, 1077~1136)이 특히 두드러진다. 법연에서 원오를 거쳐 대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남송 이후 임제종이 선종의 주류로 자리 잡는 큰 줄기가 되었다.

〔행장 자료에 관하여〕 이 행장은 원오 선사의 어록과 탑명(塔銘) 계열 자료, 후대 등사(燈史, 오등회원 등)에 전하는 사실과 한·일 백과 및 관련 자료를 두루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연도·지명 등 세부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같은 총서의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혜홍 惠洪 찬)은 편찬 시기가 원오 선사의 활동기보다 앞서 그의 전기를 싣지 않으며(원오의 전기는 그 속편인 『승보정속전(僧寶正續傳)』에 실린다), 같은 저자의 『임간록(林間錄)』 역시 일화 모음이라 별도의 행장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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